장롱 속의 참고서

by SJ in Wonderland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예전에는 '신남'이라는 이름이었고 지금은 '김유정'으로 바뀐(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경춘선 기차역 근처 봉긋 솟아오른 언덕 위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어머니가 졸업한 금병초등학교다. 외가는 신남역에서 철길을 따라 다시 서울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촌역으로 이어지는 터널들이 나오기 직전인 '팔미리'에 있었다. 지금 보면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어린 여자아이의 걸음으로 농로를 따라 들판을 가로지르고 징검다리 박혀 있는 개천을 몇 개 건너는 길은 늘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외가는 그래도 팔미리에서는 살 만한 집안이었지만 1960년대 당시의 시골 경제 사정이라는 게 어차피 까 보면 그 집이 그 집이었던데다, '딸라빚'이라도 내서 공부를 시켜 집안을 잇도록 가르쳐야 할 아들도, 그렇다고 살림 밑천이라는 장녀도 아니었던 어머니가 중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기는 어려웠을 거다. 그 당시 가난한 농가의 딸들이 대개 그랬듯이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돕다가 조금 더 큰 뒤에는 도시로 나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꼼꼼한 손재주를 살린 '봉제 공장' 직원이었다. 공장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양복점 '시다'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버지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것이 아마 어머니가 아버지를 소개로 만나 결혼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결혼을 전후해 아버지는 의류수출 호황의 기세에 올라타 봉제 공장을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오일 쇼크로 크게 실패하고 안양시의 구석에 양복점을 차렸고, 어린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이유로 양복점을 인천으로 옮겼다가, 아버지의 양복 기술을 눈여겨 본 단골 아저씨가 마침 '인천 제5공단'에서 의류회사를 경영하던 사람이라는 인연으로 그 회사에 기술담당 관리자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 가족의 경제적 사정은 그 때를 기점으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인천시 남구 주안 6동 범양아파트 108동 401호. 좁은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첫 '마이홈'을 사고 아버지의 회사 생활도 순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쯤이었을 거다. 우연히 열게 된 안방 화장대 옆 서랍장 속에서 처음 보는 책들을 발견했다. 어찌됐든 집에 새로운 책이 들어왔는데 내가 안 읽을 수가 있겠는가! 걸신 들린 듯 책을 끌어안고 하나 하나 펼쳐보니 중학교 과정의 국어, 문학, 영어, 국사 참고서들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주안역 근처의 종합학원에 등록을 하고 사 온 책들.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아 10년쯤 기른 뒤에 어머니는 다시 못 다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거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근하고, 동생과 내가 학교에 간 오전에 집안 일을 다 끝내 놓고, 오후에 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우리가 하교하기 전에 집에 와서 밥을 해 놓고, 저녁에는 아파트 상가에 조그마한 공간을 빌려 마련한 수예점에서 구멍난 바지를 꿰매거나 어느 집 커튼을 만들며 돈을 보태셨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그보다 좋았던 건 역시 '중학생 형들'이 보는 교과서를 어머니의 참고서를 통해 미리 훔쳐 보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책들을 읽는다고 꾸지람을 듣지야 않았겠지만, 어머니가 굳이 꺼내놓지 않았던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해서 몰래몰래 읽고 그대로 넣어 두었다. 학원을 다니시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책들을 몰래 읽고 넣어둔다는 걸 알고 계셨겠지.


서랍장 속의 참고서들은 중학교 과정을 거쳐 고등학교 과정까지 올라갔으니 어머니는 그 뒤도 꽤 오랫동안 학원을 다니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검정시험을 통해 중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고등학교 과정까지 공부하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두 자식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학원비니 뭐니 해서 돈 들어갈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공부를 계속하기가 어려워졌으리라. 학원을 그만 둔 어머니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놈들이 무슨 과목이 어렵고, 무슨 과목이 재미있는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소리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중등교육 교과 과정이 하도 변화무쌍하다보니, 어떤 아이들은 학년이 바뀌어도 같은 과정을 공부하는 아이러니를 참아 내야 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를 읽다 보니 난데없이 어머니 화장대 옆 서랍장 속의 중학교 참고서를 몰래 읽던 시절 생각이 났다. 참고서 앞에 적힌 학년은 분명히 달라졌는데 같은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면, 또 그걸 '나선형 교육과정'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하면 난 말 그대로 '대실망' 했을 거다.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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