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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l 12. 2022

차별과 혐오라는 우리들의 공통분모, <배드 럭 뱅잉>

엘리트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조 어린 풍자

대학 수업에서 배웠던 동구권의 역사는 끝없이 참혹하고 암울했다. 경제는 몰락하고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시민들이 일으킨 자유화 운동은 거리를 점령한 탱크 앞에서 무력하게 진압될 뿐이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냉전의 끝무렵, 고르바초프 서기장에 의해 촉발된 동유럽 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구권 국가들은 자유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침내 이룩한 자유화의 빛 속에서도,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계급의 어두움은 청산되지 못했다. 단지 그 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들은 새로이 차별과 혐오를 생산하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영화 <배드 럭 뱅잉>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다. 엘리트란 무엇인가. 라두 주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 질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응당 엘리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엘리트 교사의 성적 사생활이 갑작스레 온 세상에 노출되었다면? 그래서 그 교사를 두고 엘리트 학부모들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면. 그 회의는 과연 엘리트들의 이성적인 대담으로 흘러갈까?



영화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군상들이 어떠한 역사를 밟고 그곳에 올랐는지, 그들이 과연 엘리트라 불릴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 민낯을 들추며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한다.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된 영화에서, 1부는 우선 루마니아 거리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팬데믹 속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고, 가게 진열대에는 디즈니 상품들이 놓여있으며, 아이들은 <레이디버그>와 <범블비>를 이야기했다. 우리의 일상과도 겹쳐지는 이 화면 속에서, 우리는 곧이어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게 된다.


보란 듯이 인도 위에 차를 세운 운전자와 자기 혼자 바쁘다며 고자세를 취하는 마트 손님,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마스크를 거부한 사람들. 배려를 상실한 사람들로 거리는 침식당하고 있었다. 차도 없는 주제에 비키라고 하지 말라며, 그렇게 가난하면 물건을 많이 고르지 말라며, 마스크를 안 써도 코로나 따위 걸리지 않는다며.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대한민국에서도 어딘가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다. 이기심에서 비롯된 그들의 만행은 이미 루마니아만의 탈선이 아니었다.



혐오로 점철되어 가는 시내의 모습을 지나, 2부에서 영화는 드디어 그 진가를 발휘한다. 감독은 아름답고 정의롭다 포장되어 온 개념과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씁쓸한 현실을 드러냈다. 공산당 타도를 외치던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어쩌다 동구권 유일의 유혈 혁명이 되었는지, 사람들을 품어야 할 정교회는 어째서 군에 쫓기는 시민들을 외면하였는지, 멋들어진 인민궁전 건설 당시 얼마나 많은 인부들이 희생되었는지. 이에 더해 감독은 사회 전반에 녹아든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소비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며, 자국 루마니아를 향한 쌉싸름한 자조를 띄워 보냈다.


2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중 이러한 질문이 있다. 어째서 우리는 이성보다 감성이 더 윤리적일 것이라 믿는가. 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마음을 따르는 선택이 더 정의롭다 믿는 걸까. 사람의 마음이 한 점 부끄럼 없는 고결한 무언가라고 믿고 있는 걸까. 감독은 이에 대해 공포정치와 마녀사냥이라는 두 극단적인 예시를 들며 위 믿음이 언제나 옳지만은 않음을 이야기했고, 3부로 넘어와 그 극단을 직접 보여주며 1부에서 던진 교사 에미(카티아 파스카리우)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에미를 심판대에 세운 학부모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쏟아내었지만,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자신들은 명문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킨 엘리트들이라는 것. 비록 유출된 성관계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볼 정도로 저질스럽고, 에미를 향해 창녀이니 유대인이니 조롱과 비방을 퍼부을 정도로 천박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은 품위 있고 정의로운 애국자라 부르짖었다. 사랑하는 조국이 저질러온 과오로부터는 눈을 돌리고, 논리적인 반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저 마스크 너머로 한없이 저급한 비방과 눈먼 믿음만을 토해냈다.


스크린을 통해 학부모들의 긴급회의를 함께하며, 저들이 정말 엘리트라 불릴 만한가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엘리트란 무엇일까. 저들의 위선을 바라보며 문득, 어쩌면 엘리트란 누군가를 짓밟음으로써 비로소 위에 서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 2부, 3부를 지나오며 영화는 루마니아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카메라로 좇아왔다. 약자를 향한, 여성을 향한, 집시와 궁객을 향한. 과거로 돌아가고픈 기존의 기득권층은 계급이 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구별짓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를 멸시하고 폄하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갖은 이유를 대며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겠지. 그러기 위해 선택된 마녀사냥의 제물이 이번에는 에미였던 것이다. 추악한 민낯이 다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을 엘리트라 칭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입가에도 쓴웃음이 지어졌다. 에미가 홀로 견뎌내야 했을 분노와 모멸감에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보다도 우리 사회에 대한 씁쓸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영화 속 보이지 않는 폭력은 루마니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구권의, 유럽의, 전 세계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공통분모다.


차별과 혐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전반에 걸친 거대한 사회문제 중 하나이다. 언제부터 세상은 혐오 사회가 되었고, 왜 우리는 그 흐름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엘리트관으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상대방을 비방하며 센 척하고 위선을 챙겨야만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 사실 진정한 엘리트는 영화 속 에미처럼 진실을 목도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일 텐데 말이다. 영화는 두 상반된 엘리트들을 대립시키며 우리에게 묻는다. 어느 쪽을 고를래?라고.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지켜본 우리라면, 어떤 결말을 고르겠냐고.


에미처럼 원더우먼이 되어 불의에 맞설 수는 없더라도, 혐오의 연쇄를 끊는 건 바로 지금 우리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씁쓸한 공통분모를 이제부터라도 줄여가야 하지 않을까.




여러 커뮤니티에서 본 작품의 무삭제판이 화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 그 잠깐의 자극일까. 3개의 챕터를 거쳐 결말에 다다른 뒤 생각해본다면, 그 자극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향한 감독의 풍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 본 글은 배급사 알토미디어㈜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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