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 공원의 건립자, 존 해먼드에게는 꿈이 있었다. 아이들이 실제로 만지고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는 신비를 이뤄내는 것. 그는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공룡들의 낙원을 만들고자 했다. 만일 그에게 죄가 있다면, 꿈과 이상에 젖어 현실의 욕망들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겠지. 그가 공룡의 신비에 눈이 멀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공룡의 가치에 눈이 멀어 있었다. 1993년 '쥬라기 공원'을 무너뜨린 것도, 2015년 '쥬라기 월드'를 무너뜨린 것도 모두 공룡을 상업적,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이었다.
이번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의 오프닝은 우리에게 전작의 대혼돈 이후 인류와 공룡 모두가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는지를 보여주며 막을 올렸다. 마치 누구의 편에 설 거냐는는 듯 영화는 인류의 피해와 공룡의 피해를 차례로 보여주었지만, 현실의 동물 이슈와 같이 어느 한쪽으로만 완전히 기울 수는 없는 상황이다. 위협을 줄이고 효용을 높이기 위해 그들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글쎄. 고민의 답을 아직 내리지 못했을 때, 영화는 시선을 돌려 어느 한 인물을 비추기 시작했다.
고생물학자 앨런 그랜트(샘 닐)는 <쥬라기 공원> 1편과 3편에서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화석 발굴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는 살아있는 공룡과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바위 속 유산을 찾고 있다니. 그는 그것이 과학이라 했고 나 또한 이에 공감하지만, 누군가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당장 생각해봐도 2억 년 전 죽은 공룡보다는 바로 어제 죽은 공룡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쥬라기 공원 3>에서 그러한 대화가 오가기도 했고 말이다.
'쥬라기 공원 사건'을 겪은 이후 그는 매일 랩터의 악몽을 꾸며 잠에서 깼고, 때문에 그렇게나 좋아하는 공룡들과도 일부로 거리를 두며 더욱이 화석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공룡을 만지며 느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인젠이 만들어낸 공룡에 대한, 보다 정확히는 벨로시랩터에 대한 커다란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고, 그 무게에 짓눌린 채 30년가량을 버텨와야 했다. 누구보다 공룡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공룡을 멀리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그랜트 박사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발굴지를 벗어나 동료와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 것인가.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았던 고대 생물과 다시 한번 엮일 것인가. 그리고 마침내, 트라우마의 근원인 벨로시랩터와 또다시 마주할 것인가. 변화를 거부한 채 계속 과거에만 머물렀던 그였지만,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게끔 했다. 오웬(크리스 프랫) 그리고 메이지(이사벨라 서먼)와 함께 블루(벨로시랩터)의 새끼 베타를 구해내는 장면에서, 그의 얼굴에는 비로소 무거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난 듯한 개운함이 감돌고 있었다.
랩터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던 그가, 이제는 랩터에게 손을 뻗어 그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닿을 수 없는 악몽의 존재에서 손을 뻗을 수 있는 교감의 존재로. 단순한 위협이나 공포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작용하는 거대한 생명의 공동체로. <쥬라기 공원>에서 <쥬라기 월드>로 넘어오며 바뀌었던 랩터의 이미지가 비로소 그 의미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대신 마주 보고 공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가는 것이 쥬라기 시리즈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그랜트 박사의 복귀는 결코 팬서비스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영화는 결말에서 현생 동물들과 어우러진 공룡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코끼리와 함께 초원을 거니는 트리케라톱스, 새들과 함께 하늘로 도약하는 프테라노돈. 어쩌면 이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길을 벗어나고 있던 건 우리 인간뿐일지도 모르겠다. 공존을 떠올리기도 전에, 통제하고 착취하려고만 했기에.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오만한 욕망만을 앞세워 그들을 생명이 아닌 자산 혹은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서 대해왔을지도 모른다.
작중 들려오는 대사처럼 생명체들의 공동체는 거대한 동시에 취약하다. 어느 한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만으로도 무너지고 불타버릴 정도로 연약하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생태계의 파멸을 앞선 작품들 속에서 다섯 차례나 봐오지 않았는가. 물론 그 순간마다 항상 생명은 길을 찾아내어 왔다.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는 우리 인간만이 그 길에 함께 오르면 된다. 수각류와 용각류로 대표되는 공룡만이 아니라 익룡과 단궁류, 태곳적의 메뚜기떼까지 되살아난 지금이야말로 이제는 그들과 공존해야 할 쥬라기 월드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쥬라기 월드의 완성이다. 존 해먼드가 심어놓은 꿈의 씨앗이 <쥬라기 월드>에서 자라나, <폴른 킹덤>을 초석으로 삼고 비로소 <도미니언>에서 피어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공원에서 공룡에게 먹이를 주던 아이의 모습에는 우리도 없고 티켓도 없었다. 존 해먼드가 꿈꾸었던 인간과 공룡의 낙원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한 쪽을 가두고 이용하는 게 아니라, 같은 곳에 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 물론 생태계는 언제나 성함과 쇠함을 반복하기에, 지금의 공존과 평온은 언젠가 깨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룡과의 조우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길을 배울 수 있었다면, 분명 우리 또한 다시 돌아오는 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