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화면 구석에 묵혀놓았던 글들이 있다. 너무나 남기고 싶었지만 자칫 감정이 앞설까 봐 쉽사리 시작하지도 끝맺지도 못했던 글들. 언제나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그런 글들이었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어보려 한다.
영화 <박화영>.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에서 놀랍도록 이슈가 되었던 이 영화를, 과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귀에 들려오는 섬뜩한 후기들에 설령 작품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더라도, 이 제목마저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박화영>은 선풍이었고, 또 논란이었다. 지나치다 할 정도로 날 것 그대로였던 영화 속 아이들의 욕설과 비행, 불편하고 께름칙한 폭력의 연속. '하이퍼 리얼리즘'을 표방한 이 작품의 비주얼은, 좋은 의미로든 싫은 의미로든 관객에게 충격을 남기는 데에는 분명히 성공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평을 남겼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도중에 재생 버튼을 멈추거나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으리라. <박화영>을 사랑하는 나조차도 이 의견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듯, <박화영>은 불쾌하고 불편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화면을 가득 채운 뿌연 담배 연기와 지그시 우리를 눌러오는 폭력의 가시는, 영화 속 세상을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다른 공간으로 보이게끔 했다. 편안하고 포근한 우리네 일상이 아닌, 거칠고 답답한 비일상의 공간. 우리가 십 대 가출 팸의 세상과 마주한 첫 번째 조우였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화영(김가희)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며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확인하고자 했다. 스스로 물주가 되고 스스로 광대가 되면서까지 그 무리 속에서 버려지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실제로 화영이 없었더라도 아이들은 큰 무리 없이 잘 살아갔겠지. 단지 새로이 잘 곳과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수고가 조금 생길 뿐. 아이들에게 화영은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리한 딱 그 정도의 아이였기에, 묘하게 맞아떨어진 불균형한 이해관계만이 그들을 묶어주고 있었다. 때로는 힘이 곧 법이 되는 무질서한 정글과도, 때로는 서열이 모든 것인 강압적인 봉건국가와도 같은 가출 팸의 무리에서, 화영은 갑은커녕 을조차도 되지 못한 밑바닥의 아이였다.
그러나 영화는 화영을 동정하지 않았다. <박화영>에는 극적인 음악도, 유려한 화면 전환 따위도 없었다. 영화는 그 무엇도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끔찍이도 사실적이게, 마치 그것이 스크린을 뛰어넘은 현실인 양, 담담하고 가만하게 그들의 세상을 직시했다. <박화영>은 분명 착취당하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영화가 아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혼자 달려 나가지 않고 그저 한 발자국, 천천히 눈을 맞추며 그들의 존재와 현실만을 제대로 인지하고자 했다.
영화 속에서 박화영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화영과 눈을 마주쳐 대화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개를 돌린 채 그저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 돈다발과 함께 말을 던졌다. 지쳤겠지. 포기했겠지. 화영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그랬기에 둘 사이는 단절되어 버렸고, 화영은 어른들을 거부한 채 바닥까지 떨어지면서도 다시 아이들 속으로만 돌아가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영을, 세정을, 세진을 바라봐 준 건 그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같은 아이들 뿐이었다. 가출 팸의 아이들만이 나를 봐주고, 나를 인정해주니까. 나 자신을 에워싼 폭력에 몸부림치면서도 오로지 그곳에서만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만 나는 내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화영과 세정 모두, 두 눈을 부릅뜬 채 위협하는 영재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폭력은 실재한다. 계층도 실재한다. 모두가 피해자나 가해자, 방관자 중 하나 이상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분명한 사실들을 다 잊어버리나 보다. 쉬쉬하고 외면하며 그저 고개를 돌리려고만 한다.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감정 없는 원조와 막연한 동정만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걷어내려고만 한다. 화영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돈과 방이었을까? 어쩌면 잠깐의 눈맞춤과, 마주한 채 나누는 대화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던 건 아이들끼리의 대화만이 아니었다. 화영의 눈길마저 무시한 채 자리를 떠나버리는 어머니의 모습에도 차갑고 날카로운 폭력이 서려 있었다. <박화영>은 우리에게 단순한 불쾌감이나 자극을 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그 모든 폭력들을 직시한 뒤 이상과의 괴리를 느끼며, 우리가 이제껏 외면해왔던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끔 했다.
왜냐하면 알아야 하니까. 어른들은 모르니까. 제대로 알지 못해서는 자꾸만 엇나갈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어른과 아이 사이의 평행선이 좁혀지지 않고 그 간극이 자꾸만 더 멀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돌려본다고, 모든 어른들이 이 영화를 찾아본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아프더라도 프레임을 벗어나 진짜 세상과 마주하기 시작한다면, 앞을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