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운명을 좌우하는 연출의 중요성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국을 등에 업고 창대히 비상하였으나,
너무 많은 것을 실은 끝에 창대하게 추락했다.
개봉 전 시사회 이후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서 걱정과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본래 조금 더 반응들을 보다가 극장에 갈 예정이었으나, 이건 오히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확실하겠다 싶어서 개봉일에 바로 관람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워낙 최악을 상정하고 각오했었어서 그런지 내 우려보다는 다행히도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훌륭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영화는 분명 늠름하게 비상했다. 하지만 비행기 속 가득 욱여넣은 클리셰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자, 영화는 휘청이고 결국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동진 평론가의 파이아키아 리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영화에서 빌런의 정체는 전혀 스포일러가 아니다. 류진석(임시완)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내가 악당이오.''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며, 그 이른 등장만큼 그 퇴장 또한 굉장히 일찍 이뤄지니 말이다. 이 영화의 메인 악역을 굳이 정하자면 류진석이겠지만, 그는 일종의 맥거핀으로서 어디까지나 극에 사건을 불러오는 발단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실제로 이 영화가 초점을 두고 있는 곳이 누가 왜 재난을 일으켰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재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였기 때문에, 류진석의 이른 퇴장은 오히려 좋은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또 임시완의 연기가 정말 얄밉도록 인상적이어서, 그의 캐릭터는 사라질지언정 그 임팩트까지는 휘발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계속해서 이상한 화학작용들이 일어난다. 긍정적인 인상을 남긴 무언가가, 유사품과 만나 결국 부정적인 결과물을 남긴다는 것이다. 작중 류진석은 엘리트로 설정되었다. 부모의 억압 속에서 길러져 온 엘리트, 서러브레드. 그런 그가 범죄를 벌인다는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납득 못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구태여 그를 '엘리트'라 칭했고, 영어를 쓰며 구인호(송강호)를 조롱하던 아이들과 <부산행>의 용석을 연상케 하는 비즈니스석의 승객을 등장시켜 반엘리트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이상한 정서를 굳이 영화 속에 끌어들였다. 엘리트는 악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악이 될 수 있다. 영화는 명확한 신념도 없이, 어떠한 설명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무책임하게 클리셰로서 그것을 가져왔다.
우리는 착륙하지 않겠습니다.
아마 이 영화의 가장 큰 노림수는 이 대사였지 않을까 싶다. 헛웃음이 나오며, 정말 어찌 들으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 그러나 해볼 수는 있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을 외치는 무리들도 있고 말이다. 나 역시 팬데믹 당시에 락다운의 필요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니까. 나에게 이를 비난할 자격은 없겠지. 당시의 난 설령 내가 집 안에 갇히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종교의 자유가 박탈되고 또 누군가의 가계가 휘청이게 되더라도, 이 전 사회적인 재난을 하루빨리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영화 속 그들의 결정이 특별히 숭고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재미있는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최악의 장면은 수민(김보민)이 재혁(이병헌)을 찾아가 아토피 얘기를 하는 신이었다. 수민의 그 걱정 자체는 너무나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마음이었다.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건 정말 누구나가 하며 살고 있는 고민이니까. 하지만 앞선 '내리지 않겠다'라는 선언과 맞물려, 이 아무렇지 않아야 했을 대사는 마치 그러한 걱정과 그에 따른 희생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듯한 위험한 압박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희생'당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집단 심리에 의한 소수의 희생은 마녀재판이나 인신공양과 다를 게 없어진다. 이 영화에서 승객과 승무원들이 내린 결정이 숭고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또한, 그것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감정적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착륙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시위가 한창인 도중,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승객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화상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사랑한다, 남은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 등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조금 충격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을 화상전화 화면 속 얼굴로 가득 채워, 그것을 한 명 한 명 이어놓다니. 이토록 직접적인 신파 주입은 또 오랜만이었기에 나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끝에는 통신이 좋지 않아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채로 끊어지는 연출까지…….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신파에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당황했었다.
영화의 후반부가 무너진 이유는 신파만이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을 넘긴 시점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치 강박이라도 있는 듯이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영화는, 이미 보여줄 걸 다 보여줬음에도 자꾸만 아직 뭐가 남아있다며 러닝타임을 늘려갔다. 솔직히 미국의 착륙 거부 직전까지,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은 다 나왔다고 생각한다. 비행기 안팎에서 해야 할 일을 해내려는 사람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쑥 찾아오는 악의와 재난의 존재, 그리고 그러한 재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편 가르기와 배척 등의 현주소까지. 그러나 영화는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았다며 회항을 결정했고, 그 순간까지 올라가던 이 영화에 대한 평가도 기수를 틀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은 착륙을 거부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착륙하게 되겠지. 그런데 갑자기 이번에는 착륙해야 할 비행기가 내려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 발언의 위험성은 차치하고, 일단은 영화가 그런 선택을 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기어이 집단 희생을 보여주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다시 빨리 비행기를 착륙시켜야 된다고 하더라. 신중해야 한다고, 지상의 사람들도 국민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물론 이 거듭된 손바닥 뒤집기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는 명확하다. 매정한 현대사회와 자위대가 주는 긴박감,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마음을 자극하는 신파, 그리고 결국에는 해피엔딩.
하나하나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과연 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늘리면서까지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영화의 핵심은 이미 진즉에 끝났는데, 그저 자꾸만 곁다리를 붙여가며 이야기를 늘어트린 건 아니었는지. 영화가 관객을 납득시키지 못하니 후반부에 들어 급격히 이야기가 무너졌고, 결국 앞에 있던 핵심까지도 흐려져버리는 역효과가 나오고야 말았다. 사회적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면 차라리 뒤 1시간을 통째로 들어내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영화 <비상선언>은 신선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겪어왔고 또 여전히 겪고 있는 팬데믹과 맞물려 스크린 바깥에서 리얼함과 스릴을 끌어올 수 있었던 영리한 영화였다. 이름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던 배우진은 영화 속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빛은 극장에서 놓치기에는 심히 아까운 비주얼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겠다는 지나친 과욕인지 아니면 그저 전반부가 시기를 잘 만난 요행이었을 뿐인 건지, 클리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 영화는 중반을 지나며 힘없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겨우 침몰만을 면한 채 바닥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결국 <비상선언>이 본래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묻혀버린 채, 아무리 인상적인 소재와 훌륭한 배우진이 모인다 하더라도 연출에 실패하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씁쓸한 실패만이 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