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나와버릴 때가 있다. 오늘을 버텨낸 스스로가 대견하지만, 내일도 분명 오늘만큼 힘들 테니까. 이렇게나 땀 흘리는데, 이토록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째서인지 풍경은 여전히 어제의 모습 그대로다. 앞으로 나아간다 믿고 있으면서도, 마치 제자리걸음을 걸은 듯한 불안에 빠질 때가 있다. 언젠가 우리 앞에 동아줄이 내려오기는 할까. 그런 기대를 비웃는 듯 세상은 우리를 더 큰 위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벌써 몇 년이 흘렀으며, 벌써 몇 번째 '대유행'인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을 때면 어김없이 새로운 고비가 나타났다. 이제는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세상이다. 나아가고 싶지만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씩 저 아래로 빠져들고 만다. 일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며 어떻게든 또 하루를 버텨내겠지. 그러나 침대에 누워 내일을 생각하면 또다시 한숨이 나오고야 만다. 내일에 대한 기대도, 내일을 움직일 마음도, 그 한숨에 섞여 조금씩 나로부터 빠져나갔다. 그래, 어느샌가 나는 우울의 늪에 떨어져 있었다.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화면 속에서, 주리(심달기)의 하루는 일견 자유롭고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 커피와 담배를 즐기는 하루.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또 게임과 함께 잠에 들었다. 말로만 들어도 얼마나 황홀할지, 매일이 방학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팬데믹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였기에 그 잠깐의 달콤함을 공감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까지 생각이 닿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주리 역시 팬데믹의 주민이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건 따스한 여유가 아니라 지독한 권태였던 것이다.
주리는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었다. 아직까지도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캠코더를 애용했고, 벽에는 고전 작품들의 포스터가 걸려있었으며,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조차 과거의 정취가 풍겼다. 반가운 과거들과 마주하며 그에게서 점점 더 나 자신을 발견해갔다. 너도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너도 과거를 추억하는구나. 그리고 너도 깊은 우울에 빠져버렸구나. 어쩌면 그도 내일이 막막해 시선을 뒤로 돌려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해맑게 빛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코로나 블루는 일종의 기폭제였다. 평소라면 쉽게 털어냈을 텐데. "아니야, 일어나자."라고 말하며 극장으로 달려갔을 텐데. 작년의 나는 도통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것을 즐길 에너지를 도저히 모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나는 영화와 멀어지고 마는 걸까. 그저 그 빛을 놓쳐버릴까 겁이 나, 예전에 적었던 글들을 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나는 우울이라는 상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속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는 못했기에. 구체적인 과거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주리에게 이렇게나 동질감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캠코더 속 영상은 언제 적 일이었을까. 마스크 없이 추억을 남기던 시절은 벌써 우리에게 꽤나 먼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찍지 않았던 걸까? 이제는 그곳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주리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부터 조금씩 마음의 창을 닫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상처 입기 싫어서, 실패하기 싫어서, 혹은 그저 너무나 지쳐버려서. 또다시 누군가의 모습을 담는 대신, 과거의 추억만을 좇으면서 늪의 경계에 서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마 우울에 잠겨, 권태에 빠져, 다시 한번 찍고 싶어도 찍을 수가 없었던 거겠지.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갔다.
계기가 필요했으리라. 우울의 늪에 빠져버린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꽉 부여잡고 일어설 동아줄이 필요했다. 엄마의 김밥집을 대신 맡아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 주리에게는 그게 시작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고, 너무나 갑작스레 떠맡겨진 일이었기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며 억지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피곤했을까. 대뜸 대화를 걸어오는 손님들에, 막무가내로 에너지를 쏟아붓는 손님, 알레르기가 있어 신경을 써야 하는 손님까지.
하지만 주리는 투덜대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눈앞에 내려온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피곤하다며 피해왔던 그 모든 만남과 소통들이 다 우리에게 내려온 수많은 동아줄들이더라.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자 주리는 다시금 캠코더를 들게 되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오늘을 새로운 추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막막하고 고달픈 내일이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내일을 준비할 수가 있었다.
바뀌지 않을 내일에, 길이 보이지 않는 내일에, 걱정하고 한숨 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영화 <말아>는 결코 판타지를 그리지 않았다. 백수였던 주리가 면접에 합격하는 해피엔딩으로는 아무런 공감도 끌어내지 못했을 테니까. 영화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화면에 담았다.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눈물 흘리며 때로는 좌절하면서도, 그 늪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동아줄이 되어주었기에. 단번에 일어나지는 못할지언정 다시 한번 내일을 바라볼 수 있음을,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만약 당신이 오늘도 한숨으로 하루를 보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의 늪에 빠져버렸다면, 이 영화를 통해 따사로운 응원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