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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26. 2022

배우 심달기가 보여준 아픔들을 돌아보며

동아, 정선, 아람을 넘어 주리가 되기까지

배우 심달기라 하면 내게는 아직도 <동아>에서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위태롭게 흔들려 당장이라도 탈선할 것만 같았던 아이. 불안과 절박함으로 가득했던 아이. 사실은 너무나 평범했던, 우리와 같았던 아이. 누군가는 그저 아이들의 일탈이라 치부할 때, 동아(심달기)는 우리 안의 불안을 함께 공유해준 인물이었다. 같은 아픔 속에서 같이 몸부림쳤기에,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있는 거겠지.


<동아> 이후로도 심달기 배우가 맡았던 배역들 중 대다수가 저마다의 아픔을 지니고 있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며 씁쓸한 위로를 전하고는 했다. 그런데 <말아>의 주인공 주리(심달기)는 조금 달랐다. 이전의 모습들을 떠올리면 조금은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무엇이 달랐는지. 지금까지 배우 심달기가 보여줘 온 아픔들을 돌아보며 한번 생각해보자.




영화 <동아>의 동아는 불안 속에 갇혀있었다. 상대가 떠나갈까 봐. 나 혼자 남겨질까 봐. 그래서 자꾸만 무언가를 주려고만 했다. 20만 원이 넘는 운동화도, 빼곡히 채운 손편지도,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도. 그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었기에.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그 사람 곁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동아의 곁에는 힘이 되어줄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차마 그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다시 실망하게 될까 두려워서, 어쩌면 내밀어진 그 손이 조금은 부끄러워서, 아니면 그저 너무나 피곤해서. 썩은 동아줄임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나를 끌어올려줄 그 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동아의 눈에는 그 줄만이 분명하게 보였을 테니까.



영화 <흉> 속 정선(심달기)의 세계는 몹시나 불안정했다. 동생을 조용히 시키고 억지로 웃어 보여야만 비로소 또래 아이들과 이어질 수 있었다. 짓궂은 장난을 치며 고집을 부리는 동생은, 분명 정선에게 크나큰 짐이자 걸림돌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었다. 동아가 남자 친구를 놓지 못했듯이, 그 또한 동생만이 자신을 필요로 해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정선은 그저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동생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토록 손을 뻗었던 게 아닐까.


그 많은 짐을 지고도 정선은 동분서주 노력하며 아슬하게 가족과 친구라는 두 세계를 유지해갔다. 어르고 달래며 미안하다 사과하고. 그러나 단 한 마디의 말 앞에서 그의 세계는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나쁜 년'. 그 많던 희생은 다 사라지고 어느샌가 정선은 그저 나쁜 년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불렸으면, 대체 얼마나 폭력 속에서 살아왔으면. 그저 철없던 동생마저 폭력에 물들고야 말았다. 작품 속 숨바꼭질은 과연 정선의 이기심 때문이었을까. 혹 누구도 안아주지 않았기에, 동아의 말처럼 이젠 너무 지쳐버려 끝내 손을 거두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최선의 삶>의 아람(심달기)은 기어이 아픔에 익숙해져 버렸다. 매일 얼굴에는 상처가 늘어갔고, 그럴 때마다 점점 아픔에 무덤덤해져 갔다. 썩은 동아줄을 잡았던 동아는 결국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고는 또 새로운 폭력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으리라. 동생을 두고 온 정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필시 또 나쁜 년이 되고 말았겠지. 동아와 정선, 그렇게 그들 모두 아람이가 되었을까.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집에서는 상처가 자라났고, 나와 같다 믿었던 친구들은 나를 남겨둔 채 하나둘 저 위로 올라갔다. 이제 그는 동아줄 따위 찾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홀로 살아남기에 필사적이었다.


나는 아람이야말로 완성형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아프면 아무 소리도 못 낸다던 소영의 연기를 본 뒤 내뱉었던 한기(寒氣). 최대한 소리를 질러야 조금이라도 덜 맞는다는, 정말로 아파본, 지금 그 아픔 속에 있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생존 방식. 어쩔 수 없다며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고 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고도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 세상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버티는 것뿐이니까. 더러운 꼴을 안 보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니 그 더러움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영화 <말아>의 주리와 만났다. 주리가 이전의 인물들과 비슷한 과거를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현재는 그들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를 둘러싼 폭력은 세상을 덮친 바이러스로부터 촉발되었다. 사람을 집 안에 가두고, 가계를 휘청이게 하며,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만든 바이러스. 가슴속에서 쌓여오던 아픔들이 팬데믹을 핑계로 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우울과 권태, 고독으로 가득한 매일 속에서,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주리의 마음도 아람의 얼굴처럼 퍼렇게 멍들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배우 심달기를 알고 있었기에. 주리도 그들처럼 아픔에 익숙해지나 했지만, 그의 선택은 조금 달랐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았던 동아와 달리, 주리는 싫다 하면서도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정선은 끝내 등을 돌려 체념하고 말았지만, 주리는 끝까지 멸치 김밥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람은 아픔 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강구했지만, 주리는 그 속에서 한 발자국 내딛기 위해 선택하고 움직였다. 아람의 방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주리의 모습이 내게 또 다른 길을 보여준 것 또한 사실이다.



<말아>는 결코 긍정의 힘이나 만남의 기적을 외치는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해피엔딩이라 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주리와 엄마는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고, 빵집도 김밥집도 예전과 같은 활기는 잃고 말았으며, 호기롭게 도전한 면접은 냉정한 결과만을 남겼다. 그럼에도 영화는 밝음으로 차있었고,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이 따스함으로 꽉 차올랐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주리를 비롯한 영화 속 모두에게서 자그마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단지 오늘을 버틸 뿐만이 아니라 내일까지도 바라보게 할 가능성,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동아도, 정선도, 아람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들의 불안과 아픔을 온전히는 알 수 없기에,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멈추라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잘못된 길이든 올바른 길이든, 결국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는 건 그들 자신의 선택이다. 만약 그들이 주리와 만났다면, 아픔에서 일어나려는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까. 이 영화를 통해 나도 한 걸음 나아가고자 마음먹을 수 있었듯이, 그들도 또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 한숨 쉴 수도, 때로는 손을 놓을 수도 있지만, 부디 그 가능성까지는 포기하지 않기를.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건 주리라는 밝은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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