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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황혼은 찾아온다 할지라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by Veni Jun

케이코(키시이 유키노)는 아낌없이 삶을 불태웠다. 매일 아침 강변을 달리며 트레이닝을 하고, 체육관을 찾아 복싱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비명을 질렀을 텐데. 그는 호텔에서의 생업까지 병행하며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때로는 열이 났으며, 때로는 피를 토했고, 때때로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그는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내 몸이 어떻든, 날씨가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그저 변함없이 착실하게 매일을 불태웠다. 비록 케이코가 여느 스포츠 장르의 주인공처럼 정열을 외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이 매개가 되어 우리에게 그의 온도를 전해주었다.


그가 다니던 아라카와 체육관은 1945년부터 문을 열어 2대째 내려오고 있는, 당시 일본 최고(最古)의 체육관이었다. 그런 곳에서 이번에는 농인 프로 복서가 탄생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는가. 이대로 케이코도 체육관도 승승장구하여 황금기를 다시 여는 걸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찾아오는 회원은 점점 줄어갔고, 토지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설상가상 팬데믹이 온 사회를 뒤덮고야 말았다.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알고 나니, 그제야 하나둘 세월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거울은 얼룩져 군데군데 거뭇했고, 샌드백에는 여러 겹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으며, 글러브조차 터진 적이 있는지 곳곳에 꿰맨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제는 너무 낡아 무너지기 직전이었을 정도로, 사실 아라카와 체육관의 전성기는 진즉에 지나있었다.


체육관을 운영하는 회장(미우라 토모카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한쪽 벽에 진열된 트로피들이나 케이코와 함께 하던 섀도복싱을 보면, 젊었을 적에는 그 역시 프로 선수로 활동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프로였다 한들, 이 영화 속 현재의 회장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는 분명 선하고 따스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무력하고 안쓰러운 사람이었다. 시력과 청력이 모두 현저히 떨어졌고, 몸의 이곳저곳이 이상신호를 울려댔으며, 급기야 뇌경색까지 재발해 쓰러졌을 정도로 그는 노쇠하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일선에 나서서 선수들을 지도해 줄 수도 없었고, 언제부턴가 체육관에 앉아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최근 나는 이러한 생각들에 잠겨 있다. 혹시 우리의 수명이 너무나 길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늙고 병들어 스러져가는 육체를 억지로 연명시킬 뿐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진즉에 삶을 끝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매일 아침 추락해 가는 나의 몸으로 대체 무엇을 더 이어갈 수 있을까. 만약 우리의 소비기한도 몸 어딘가에 적혀있었더라면, 차라리 지금보다는 덜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늙어간다. 노화로 인한 면역력의 저하로 질병에 취약해지고, 각종 신체능력이 퇴화하여 생활에 불편함이 늘어간다. 탄생 이후 계속 앞질러 달리던 성장의 속도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노화보다 느려지고, 결국에는 모두 그저 늙어가기만 하는 때가 온다.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그래도 나는 살아가야 하는 걸까. 결국 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내 손과 발을 태워야만 하는 걸까.


영화에는 곧 문을 닫게 될 아라카와 체육관을 대신해서 케이코를 훈련시켜 줄 곳으로 고토 스포츠 센터라는 곳이 등장했다. 어두침침한 아라카와와는 달리, 흰색으로 도배된 실내공간과 체계화된 최신식의 장비들은 마치 넘쳐나는 에너지를 뽐내는 것만 같았다. 화이트보드로 필담을 나누는 대신 음성인식을 통해 케이코에게 말을 거는 모습에서부터 그곳의 젊음이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만약 앞으로도 복싱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프로로서 이 길을 나아가려 한다면. 케이코는 필히 고토와 같은 곳으로 소속을 옮겨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케이코 자신도 그것을 느꼈겠지. 그러나 그는 체육관을 바꾸지 않았다. 매일 10km를 달리며 트레이닝 일지까지 쓸 정도로 복싱에 열정적이었던 그가, 더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만 멈추기를 택하였다. 당시 그는 집과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고토로부터의 권유를 거절했는데, 이제까지의 그를 떠올려보면 정말 단순히 거리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멈추었던 것인지 의문이 남기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열심히, 더 열심히 연습하고 움직이며 살아오면 됐다. 안팎에서 솟아나는 장애물들에 휘청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기에 그도 삶의 전성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링에서는 프로 복서가 되어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고, 직장에서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설명하였다. 물론 농인이 청인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은 케이코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부분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그저 그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그 역시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점점 늙어가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이 작품에서는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몸은 점점 변해갔다. 피로가 풀리는 게 느려졌고,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몸에서 자꾸만 신호를 보내는 걸까. 너의 전성기는 이제 끝났다고. 그러니 이제 바닥으로 떨어질 때라고. 늦은 밤 강가에 홀로 서있던 케이코가, 내게는 마치 투신을 결심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은 고민들을 안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단지 쌓아온 인연들이 소중해서, 아직 이루고픈 목표들이 남아있어. 그러한 핑계들로 꺼져가는 삶을 붙들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십중팔구 내 비뚤어진 시각의 탓이 크겠지만, 나에게 그는 이미 노화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랬기에 그는 고토를 거절했던 게 아니었을까. 더 이상 복싱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에. 체육관도, 회장도, 자기 자신도 결국 늙고 낡아 병들어갈 뿐이라고 생각해 버려, 새로운 것에 문을 닫아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예정된 시합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 시합조차도 이기든 지든 의미는 없었을 텐데. 흘러가버린 젊음을 되찾을 수도, 다가오는 죽음을 떨쳐낼 수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삶을 포기하기는커녕 다시금 체육관에 나와 훈련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삶 속에 뛰어들어 열정불태우기 시작했다. 불꽃이 다 식어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일어서게 했고 또 움직이게 했던 걸까.



그것은 분명 빛나는 누군가와 닿았던 덕분이리라. 동생 세이지의 연인 하나가 어수룩한 수화로 말을 걸어오면서, 케이코의 삶은 아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체육관 밖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훈련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동생 커플과 한데 모여 펀치를 연습했다. 심지어 그들을 따라 어수룩하게나마 춤까지도 춰 보였으니, 그의 삶에 이보다 더 큰 변화가 또 있었을까. 자신을 따라 복싱에 관심을 갖는 두 사람이 기특했기 때문일까. 자신과 말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는 두 사람이 고마웠기 때문일까. 나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저 하루하루 늙어가며 죽을 날만 기다릴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케이코를 다시 한번 세상과 이어주었고, 그렇게 그들은 앞으로를 바라보며 함께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윽고 마무리된 케이코의 경기를 본 뒤, 회장은 무언가 결심한 듯 휠체어를 굴려 자리를 옮겼다. 어두운 병원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만 해도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자살을 결심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혼자 걷기도 힘든 몸, 케이코의 경기를 봤으니 여한은 없다며 말이다. 이후로 작중 그가 다시 등장하지는 않았기에 비록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회장은 잘 회복되어 가족과 온천 여행을 준비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길로 정말 이 세상을 떠나 저 멀리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였든, 그의 마지막은 결코 삶에 대한 비관에 묻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림자가 아닌 빛을 향해 나아갔고, 이후 등장한 아내의 표정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환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가 아니다. 그 역시도 케이코를 통해 삶의 빛에 닿을 수 있었고, 그로부터 새로운 결심을 할 힘을 받았다는 것이 곧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케이코의 경기를 보며 빛났던 과거를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걸까. 끊어졌다 생각했던 세상과 다시 이어질 수 있었기에, 그는 필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우리가 성장하며 에너지를 끌어다 쓴 반작용이 곧 노화라고 한다면, 지금 부족해진 에너지를 주변에서 이어받아 다시금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케이코가 두 사람으로부터 힘을 받아 다시 한번 일어났듯이, 그리고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회장에게 힘이 되어 주었듯이. 팬데믹으로 인해, 여러 이슈들로 인해. 갈라지고 멀어져 버린 현대 사회라고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높이에서 상대방을 바라봐 준다면. 비록 닥쳐오는 노화는 막을 수 없을지언정 홀로 늙어간다는 공허함만큼은 덜어낼 수 있으리라. 청춘이 다 지나 어느새 황혼에 들어섰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 또 다른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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