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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04. 2023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박혀오는 이야기, <애프터썬>

당신은 나처럼 후회하지 않기를

굉장한 기대를 품었다. 내가 살면서 이 정도로 고대했던 작품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빠진 내 모습을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그저 예고편 속, 아빠도 다 해본 거라는 그 말이 참 따스해서. 어쩌면 내가 만들지 못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까 해서. 어쩌면 나도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까 해서. 하나둘 끌림과 기대가 겹겹이 쌓이며 영화에 대한 마음을 점점 더 키워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영화를 보거나 감상을 적을 때 나 역시 대개 나의 과거를 되짚어보고는 한다. 그 안에서 영화 속 이야기와 대응되는 지점들을 찾고,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캐릭터들을 이해하고자 한다. <애프터썬>도 마찬가지였다. 소피(프랭키 코리오)에게서 어린 나를 보려고 했으며, 캘럼(폴 메스칼)에게서 부모님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대가 너무나 커져 버렸던 탓일까. 아뿔싸, 주객전도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들의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전에, 나는 조바심을 내며 내 안에 영화를 끼워 맞추려고만 했다.



영화의 중반까지도 나는 계속 나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이 장면에는 분명 이런 함의가 있을 거야. 저건 틀림없이 그런 상징이고 암시일 거야. 그렇겠지? 그래야만 해. 나는 그랬으니까. 나는 이 영화에 공감하고 싶었고, 이 영화를 통해 결핍을 채우고자 했으며, 끝내는 영화가 나를 긍정해 주기를 바랐지만, 정작 나는 그들을 향해 자그마한 공감의 시도조차 하지를 않았다. 그저 영화에 틀을 씌워 이렇다 규정하고는 억지로 내게 맞게끔 재단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바라봤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렇게 억지 부리지 않아도 그들은 나를 감싸주었을 텐데. 부풀어진 기대가 화가 되어, 여름날의 햇볕처럼 나 자신을 태우고야 말았다.


영화의 톤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인물들의 감정이 격해지지도 않았고, 새로운 사건이 터지지도 않았으며, 특별한 설명이 더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문득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라. 그제야 나는 비디오를 되감듯, 영화를 돌아볼 수가 있었다. <애프터썬>은 관객에게 공감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감의 여지를 주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소피에 대해서도, 캘럼에 대해서도. 영화는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고 들려주면서도 결코 설명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일상적인 부녀의 여행 속에서 하나씩 기록과 기억을 쌓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한 변곡점들이 있었다. 파스텔 빛 튀르키예의 풍경처럼 아름답게 보이다가도, 되돌아보면 곳곳에서 불안과 슬픔이 떠올랐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삽입하고, 인물 간의 고저와 명암을 대비시키며, 웃음 뒤에 편재된 위태로움까지도 화면 위에 담아냈다. 또래보다 성숙했던 아이에게도 이따금 외로움이 닥쳐왔음을, 아이 같아 못 미더운 아버지였지만 누구보다 큰 그늘에 맞서왔음을. 단지 알아채는 것을 넘어 그 아픔과 손이 맞닿게 되자, 나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그들의 이야기에 비로소 온전히 공명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여느 가족 영화와 같이 성장한 두 사람의 재회를 보여주거나, 조금 더 명확하게 그들의 현재를 묘사했더라면, 나는 필시 그 유약함을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중반까지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내게만 초점을 맞춘 채 그들을 바라봤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영화가 나를 기다려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피가 캠코더를 돌려보며 아버지를 안아주게 되었듯이, 내 생각만 불태우던 나 자신도 다른 이와 마주설 수 있도록. 나의 틀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그들을 그들로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영화는 서두름 없이 꾸준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캘럼과 소피의 표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영화가 나를 안아주기만을 기대했었는데. 이야기를 되감은 끝에, 영화는 내게 다른 이를 안아줄 방법까지도 품 안에 남겨주었다. 물론 소피가 그러했듯, 우리는 언제나 몇 발자국 늦고야 말지.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더 빨리 안아주고 잡아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고는 하지. <애프터썬>의 결말은 분명 그런 우리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조언일 것이다. 당신은 나처럼 후회하지 않기를. 설령 그럴 수 없다 할지라도 부디 자책만은 하지 않기를.


캠코더 속 영상들이 되감기며 영화가 시작된 것처럼,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장면들이 리플레이를 거듭해 점점 더 진해지고 있다. 여운이 남는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들의 표정과 눈빛이 기억에 박혀 당장이라도 다시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된다면, 오프닝의 연출도, 신과 신 사이에 배치된 기묘함도, 감정을 대변하던 노래의 가사까지도 분명 더 깊숙하게 느껴지겠지. 그러고는 '애프터 선크림'이라는 그 이름처럼, 영화는 그을려 상처 입은 마음을 또다시 진정시켜 주겠지. 최근 본 작품들 중 가히 최고의 엔딩이었으며, 올해의 영화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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