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트의 <코르네토 3부작>, 그 속에 담긴 메시지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2017년 하반기 오랜만에 돌아온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신작 <베이비 드라이버>는 음악 액션의 절정을 보여주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독특하고 속도감 있는 연출로 이미 국내에도 다수의 팬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베이비 드라이버>의 흥행과 그가 마블의 <앤트맨> 감독으로 예정되어 있던 점 등은 국내의 더 많은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필자는 <베이비 드라이버>를 일종의 포교용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맛본 그의 스타일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이라고도 알려진 <코르네토 3부작>은 에드가 라이트가 메가폰을 잡고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주연한 세 편의 영화들을 말한다. 3부작의 명칭인 ‘코르네토(cornetto)’는 유럽의 대중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작중 인물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나 바람에 날리는 포장지가 잠깐 나오며 존재감을 어필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 그리고 <더 월즈 엔드>로 구성된 3부작은 에드가 라이트 특유의 리듬감과 영국식 유머가 쉴 틈 없이 폭발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연출적인 부분이 아니라 스토리와 캐릭터가 시사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코르네토 3부작>은 그저 재밌을 뿐인 좀비 영화, 경찰 영화, 공상과학 영화가 아니다. 개성이 상실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에드가 라이트의 일침, 그리고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위로의 메시지가 영화 곳곳에 담겨 있다.
처음 이 영화들을 봤을 때는 그저 캐릭터들의 엉뚱함과 기지에 웃고 감독의 연출에 감탄하느라 지나쳤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관람을 하면서 3부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특이한 사람들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숀’은 겉으로는 평범하나 그의 친구 에드와 술집인 윈체스터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동거인이나 여자 친구와 갈등을 빚고, 서른을 앞둔 나이에 소꿉친구와 게임에 빠져 사는 그를 주변인들은 철없는 어른으로 바라본다. <더 월즈 엔드>의 ‘게리’ 역시 어린 시절을 잊지 못 하고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거부한 채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간다. 이 둘과는 달리 <뜨거운 녀석들>의 ‘니콜라스’는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유능한 경찰이지만 융통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워커홀릭이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대니’는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현실을 보지 못 하고 영화 속 경찰에 대한 동경 속에 살고 있는 캐릭터이다. 세 편의 영화들은 주인공과 충돌하는 집단에게 ‘몰개성화’ 그리고 ‘획일화’라는 키워드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에게 승리하고 성장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오프닝은 주인공의 캐릭터를 짧은 대화를 통해 제시한 후,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일상을 보여준다. 생기 없는 얼굴의 사람들은 마치 실로 연결된 듯 똑같이 움직이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는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한다. 재미있는 점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좀비 같은’ 사람들이 후에 ‘진짜 좀비’가 되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숀이 슈퍼에 가기 위해 좀비 세상이 된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걷는 장면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 중 하나이다. 영화는 숀의 행동을 통해 그의 어리숙함으로 재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그에게는 현재의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이 이전의 무기력하고 천편일률적인 세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뜨거운 녀석들>의 흑막인 ‘마을 감시 연맹’은 ‘올해의 마을상’을 받기 위해 마을 전체와 주민들을 감시 및 통제하며 마을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살해해 왔다. 그들은 마을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그 집을 통째로 폭파하고 마을의 질을 떨어트린다며 인기 있는 행위예술가를 살해했다. 파시스트와도 같은 ‘마을 감시 연맹’처럼 <더 월즈 엔드>의 흑막인 ‘네트워크’는 인류의 수준을 은하계에 맞춰 향상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정해진 행동양식을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거한 뒤 ‘블랭크(깡통)’라 불리는 로봇으로 대체하였다.
두 영화 속 흑막들의 공통점 –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를 통해 사회를 하나의 색깔로 정돈하려는 점 – 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는 자본주의 논리 아래에서 <대입-졸업-취업-결혼-퇴직-노후>라는 삶의 모범답안을 정해놓고 우리에게 제시한다. 사회는 절대 이를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인생을 살지에 대한 결정권은 개인에게 있다. 하지만 결정권을 쥐고 있다 한들 과연 자신 있게 모범답안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수많은 청춘들이 꿈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달려드는 현재의 상황만 봐도 답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공무원도 훌륭한 직업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회는 ‘안정성’이라는 무기로 개인의 일탈과 모험을 저지하고 그들을 사회가 생각하는 올바른 공동체에 편입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코르네토 3부작>은 주인공들의 성장을 통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하는 캐릭터는 바로 <뜨거운 녀석들>의 니콜라스다. 영화 속에서 3부작의 명칭으로까지 채택된 코르네토 아이스크림보다 중요한 음식은 바로 맥주인데, 세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맥주를 사랑하며 <더 월즈 엔드>는 술집 순례가 기본 스토리이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유일하게 - <더 월즈 엔드>의 앤디도 처음에는 술을 거부하지만 그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 술을 마시지 않으며 펍(Pub)에서도 오로지 크랜베리 주스만을 주문했다. 그랬던 그가 FM인 자신과는 정반대로 영화 속 환상을 갖고 사는 대니와 마음을 터놓는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둘이 함께 마신 맥주이다. 그리고 후반부 마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이 온몸을 총으로 무장하고 백마를 탄 채 마을에 나타난 니콜라스의 모습을 통해 ‘모범답안에서 벗어난’ 그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작은 대니가 건넨 한 잔의 맥주였다. 이처럼 영화는 사회가 정해놓은 틀 속에 자신을 맞춘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건네고 있다. 물론 현실의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자유와 개성만을 좇으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잠시 쉬어가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맥주 한 잔의 여유는 우리 사회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