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단편 영화 예매
2018년 7월 12일 개막작인 <언더독>의 호평과 함께 시작된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 영화제)에 작년과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출근 도장을 찍고 왔다. 부천 영화제 자체는 위치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취향에 맞는지라 이번이 세 번째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 영화제는 나 자신에게 있어 ‘처음’으로 가득하다. 처음으로 10편 이상을 관람하고, 처음으로 ‘비판홀릭’ - 영화 8편과 기념품의 할인 및 카탈로그 증정 등의 혜택이 있는 사전 판매 카드 – 을 구입했으며, 처음으로 단편 섹션에서 영화를 예매했다. <부천 초이스: 단편>과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의 두 부문에서는 4~6편의 영화들이 한 묶음으로 상영되는데, 모두 20분 내외의 짧은 영화들이기에 실제 상영시간은 일반적인 장편 영화와 비슷하다.
지인에게 처음으로 단편 영화들을 예매했다 말했더니, 처음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단편을 싫어하냐고 물어왔다. 먼저 이에 답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 물론 단편보다는 장편을 더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단편 영화에 불호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단편 특유의 직설적이고 투박한 – 모든 단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 표현이 인상적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영화제에서 단편을 예매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단편 섹션이 여러 작품들의 묶음이다 보니 특별히 끌리지 않는 작품까지 봐야 하는 게 망설여졌기 때문이지, 계속 보고 싶은 단편들은 있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단편 쪽은 훑어만 보고 아예 장편으로만 시간표를 채웠었고, 예매까지 그대로 진행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영화 별점 앱인 왓챠에서 ‘우연히’ 단편 작품들의 시놉시스를 읽게 되었고, 그 훌륭한 소재와 줄거리를 못 본 체할 수 없어 곧바로 예매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영화제 일정 첫날은 공포스러운 13일의 금요일이었지만, 호러 분위기 물씬 풍기는 영화제와 달리, 나는 앞서 말한 <부천 초이스: 단편 1>에 속하는 6편의 단편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쓰다 보니 길어진 서론 때문에 다소 늦어졌지만,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하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첫날 관람한 6편의 작품들에 대해 짧은 감상평 – 이라는 이름의 스포일러 리뷰 -을 남기고자 한다.
제목처럼 영화는 헤어(hair)를 중심 소재로 하여 진행된다. 영화에는 흑인 미용실에 찾아와 흑인 헤어스타일을 부탁하는 백인 여성과 그녀를 의심하는 흑인들에게 나타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백인 여성은 시도 때도 없이 셀카를 찍으며 흑인을 소품처럼 사용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흑인 헤어스타일은 흑인 문화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가 아니라, SNS에 올릴 사진의 콘셉트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용실 벽을 두드리며 흑인 헤어스타일을 요구하는 백인들이 생기 없는 좀비처럼 표현된 점은 백인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피상적인 흑인 유행을 상징하는 동시에, 흑인들 역시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의심하며 경계할 뿐임을 나타낸다. 백인 여성을 만난 뒤 흑인들은 한 명 한 명 금발머리가 되거나 눈빛이 변하며 마치 백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는 그들이 ‘블랙 파워’를 주장하면서도 그들 속에 백인을 향한 동경과 욕망이 잠재되어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영화는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의 인종문제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제목이 <죽어야 (다른 사람들의 체면이) 사는 남자>로 보일 것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는 아내와 함께 자신의 장례식 때 입을 옷을 고르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나한테 왜 물어보는 거야?” 이 남자의 상황도 그러하다. 구두도, 넥타이도, 아끼는 수염도 마음대로 못 하고, 심지어는 죽는 것과 사는 것까지도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그가 죽어야만 장례식이 진행될 수 있고, 그래야만 가족들이 장례식을 찾은 손님들에게 식이 취소되었다고 망신당하지 않을 수 있다. 아내와 어머니의 장례식 성공을 향한 집착이 죽다 살아난 남자를 다시 죽이기 위한 상식 밖의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영화의 포인트이다. 고전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한 재치 있는 연출과 다양하고 그로테스크한 살인 장면들이 영화의 블랙 코미디적 정체성을 살려주고 있다.
영화는 ‘좀비를 식품으로 활용하는 미래 사회’라는 쌈박한 설정 속에서 신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의 갈등과 이해를 다루고 있다. 좀비 식품 공장에 새로 들어온 세 명의 젊은 신입사원들은 각각 현실 속 청년세대가 지닌 문제점들을 상징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에 빠져 사는 사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매뉴얼만 찾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지는 못한 채 기성세대를 무시하고 비판하는 사람. 이들은 그들의 교육 담당인 ‘하세가와’와 함께 갑자기 발생한 좀비 폭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대화하고 힘을 합치게 된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은발머리의 ‘마린’과 하세가와의 행동에서 신구세대의 화합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하세가와는 마린이 떨어트린 스마트폰을 좀비로부터 되찾아주며 “나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자네에게는 저게(스마트폰이) 소중한 거지?”라고 말한다. 기성세대이며 상사인 그는 자신을 비웃었던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후에 마린이 되찾은 스마트폰으로, 좀비를 무찌르는 하세가와를 촬영하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대부분 작화가의 그림을 촬영하는 ‘셀 애니메이션’ 방식의 일본 애니메이션과 달리 ‘풀 CG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역동적인 앵글과 액션을 통해 ‘좀비 영화’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도, 각 캐릭터에 공감 가능한 특징들을 부여하여 세대 갈등에 대한 메시지를 시사하고 있다.
살짝 덧붙이자면, 사실 이번에 단편을 보게 된 결정적인,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이 영화의 ‘마린’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귀여워서(...)였는데, 결과적으로 근래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영화 보는 동안은 몰랐는데 바로 뒷줄에 제작진 분들이 앉아계셔서, GV 끝나고 시간 상 못 했던 간단한 질문이랑 인사를 드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식품으로서의 좀비’라는 설정이었는데, 1세대 좀비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2세대 좀비가 ‘희화화의 대상’이었으니 3세대 즈음되면 먹어버리는 건 어떨까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캐릭터들의 첫 대사를 듣고 목소리가 익숙해서 보는 내내 혹시나 했는데, 엔딩 크레딧을 확인하니 역시나였다. ‘우치다 마아야’에 ‘츠다 켄지로’이니 성덕들을 어서 부천으로 달려가자. 올해 가장 귀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제목인 ‘노 라인(No line)’은 ①대사가 없음 ②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스릴러 영화는 소리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대사의 공백을 메우고 관객을 이야기에 몰입시켰다. 물방울 소리, 녹이 든 쇳소리, 성냥 소리 등 생활 속 작은 소리들이 정적 가운데서 강조되어 표현되고, 이와 함께 관객들이 내는 여러 미세한 소리들도 더욱 크게 들려온다. 대사가 없음에도 배우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스토리 자체는 흔한 납치 스릴러이기에 이해하는 데 있어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스크린 안과 밖을 모두 채운 정적이 제목처럼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없애고 관객들을 극 속의 공간으로 이끌어, 몰입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장편 데뷔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님 말씀처럼 장편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실험 정신과 신선함이 인상적이었으나,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서인지 다소 과장되어 만화적으로 표현된 액션은 매끈하지 못 해 아쉬웠다. 또한 후반부에 드러나는 한 반전은 제목의 의미와 연관이 있는 듯하면서도,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졌기에 역시 아쉬움이 남았다.
주인공 소년의 머리에는 사슴의 뿔이 있다. 완전한 인간이지도 그렇다고 사슴이지도 않은 이 소년은 아버지에 의해 인간으로 길러졌다. 소년의 아버지는 사슴사냥꾼이며, 그의 집에는 박제된 사슴의 머리와 가죽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의 행동과 정체성은 그 부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뿔이 자랄 때마다 정기적으로 잘라냈고 소년에게 사슴사냥을 가르쳤다. 이는 소년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져, 청년이 된 사슴소년은 자신의 뿔을 스스로 자르고 아버지와 함께 숲 속의 사슴을 사냥한다. 하지만 자신과는 달리 큰 뿔을 지닌 채 자유로이 들판을 달리는 사슴들의 환상을 보며, 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품게 된다. 뿔을 다 자르지 않고 조금 남겨두거나 사슴에게 총을 겨누며 망설이는 등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그의 생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되는 환상과 혼란 속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이윽고 그는 자신을 속박한 아버지에게 총구를 향하고 자유를 쟁취해낸다. 영화의 마지막, 나체로 총을 멘 채 길을 걷는 사슴소년의 모습은, 의복을 걸치지 않은 사슴과 같은 몸에 잘려나간 뿔 대신 총이라는 ‘인간의 뿔’을 한 그만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부모로부터의 억압과 성장통을 다룬 점에서 작년 부천 영화제에서 상영된 <로우>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새까맣거나 새하얗거나. 배경은 오로지 이 둘뿐이고, 등장인물도 단 둘뿐이며, 심지어 영화는 카메라가 인물의 시점을 의미하는 시점쇼트로 진행되기 때문에 실제 화면에는 거의 단색의 배경과 상대방의 얼굴만 나온다. 영화는 형사에게 진술하는 전반부와 오디션 현장의 후반부로 나뉘게 된다. 전반부가 후반부의 오디션 장면이었다는 것이 배경색의 전환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때 배우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 잠시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았었다. 앞서 말했듯이, 스크린에 비치는 프레임 영역은 화면 속 배우와 마주 앉은 ‘감독(실제 감독이 아니라 영화 속 오디션 현장에서의 감독)’의 시선을 나타낸다. 영화는 ‘오디션 대본 속 인물’과 ‘관객들이 보고 있는 화면 속 인물’의 이름과 스토리의 동일성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허구(대본)를 만든 감독의 시선이 마찬가지로 허구(실체가 아닌 빛이 반사되어 맺힌 상)를 담는 카메라와 동일시되며 감독의 욕망을 현실로 가져온다. 감독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자 카메라 화면은 배우의 얼굴에서 가슴을 지나 점점 하반신으로 내려간다. 감독과 배우, 갑과 을이라는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을은 줌아웃 되며 작게 표현되고, 감독의 뒤로 붉은 코트를 입은 허구 속에서의 을의 모습이 나타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올해 초 큰 이슈였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영화계 미투’가 떠오르는 영화였으며, 배경이나 카메라와 같은 미장센을 활용하여 실험적인 연출을 한 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는 그저 배우 분의 연기에 감탄했을 뿐이었지만, 밖에 나와 생각할수록 점점 훌륭하다 생각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