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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n 04. 2019

자본주의가 만든 인간 군상, <기생충>

희망을 놓지 않고 오늘도 쉼 없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 계발서의 홍보문구에서나 볼 법한 이 문구는, 뒤따라오는 문장을 통해 사람을, 나아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구분지의 양 쪽에 좋은 것과 나쁜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배치시킴으로써 중립이 존재하지 않는 대립구도를 형성하여 우리에게 모종의 행동을 촉구한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구를 본 누군가는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 일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왜? ‘가난’은 부정적인 연상을 주고, 자신에게 그런 꼬리표를 붙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난은 나쁜가? 예전에 한 강의에서 나는 교수님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오려는 순간 멈칫했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알게 모르게 가난이 나쁘다고 단정 짓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떨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 어디에도 가난이 죄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가난을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물론 가난하다면 부유한 사람보다 덜 편안하고 덜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돈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단지 그들이 생활하기에 조금 불편할 뿐, 가난은 절대 죄가 아니다.



그럼 반대로 부자들, 상류층은 어떠한가. 수많은 창작물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악인으로 설정되어왔다. 노동자를 하대하는 자본가, 그들의 횡포, 갑질 등등. 그러나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계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부에 의한 부조리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창작물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현실보다 더욱 과장되어 재현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왜곡된 이미지는 이윽고 반(反)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를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사회를 양분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스테레오 타입이 계속해서 쓰이는 걸까? 그건 바로 특정 대상을 향한 분노야말로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쉬운 미끼이기 때문이다. 서민층이 대다수인 대중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핍박받는 주인공과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공감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들이 소위 팔리는 이야기가 되어 계속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달랐다. 두 계급의 대비를 보여주고, 심지어 상대적 약자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어주면서도 결코 신파로 극을 끌어가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염세적이라 느껴질 정도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등장인물들을 바라보았으며, 모두가 흑과 백이 아닌 회색지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점이 바로 <기생충>이 걸작인 이유다.


*이 앞에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명확하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는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기택 가족이 아들 기우를 시작으로 글로벌 CEO인 박사장네 집에 마치 기생충처럼 침투해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명씩, 한 명씩 사용인들의 자리를 대체해나가는 기택 가족의 계획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그 과정이 매우 빠르고 재밌게 진행되어, 지켜보는 관객은 마치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생충>은 그냥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중반, 편안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게 되고 그때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돌변하여 서스펜스가 치고 올라온다. 다시 말하지만 <기생충>은 그저 해맑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끝난 순간에도 우리는 웃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웃음에는 자본주의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짙은 자조가 섞여 있을 것이다.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누군가는 돈을 위해 문서를 위조했고, 누군가는 돈 때문에 4년이 넘는 시간을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들과 달리 돈을 물 쓰듯 하며 돈으로 고용한 사람마저도 물건을 바꾸듯 손쉽게 교환했다. . 기우가 박사장네 과외를 맡기로 결심하는 것도, 다른 가족들이 그곳으로 모여드는 것도 모두 오직 하나 돈 때문이다. 반지하에 틀어박힌 채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며 지내온 그들에게 고액 과외는 하늘에서 내려준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이고, 실제로 월급을 받으며 그들의 생활은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윤택해졌다. 식빵을 찢으며 저렴한 필라이트를 마시던 이들이 고기를 안주로 수입 맥주를 마시게 되었고, 후에는 박사방네 거실에 모여 앉아 온갖 양주를 꺼내 마시며 그들과 사돈관계가 되는 상상까지 펼쳤다. 위스키를 마시며 넓은 통유리 너머 비 내리는 밤의 정원을 바라보는 기택 가족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들에게는 돈이 곧 희망이었고,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순간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무지개가 보이는 동화 속 나라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계속해서 꿈을 찍어내고,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꿈의 노예가 된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에서 빈칸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상의 핵심 가치가 되는데, 예를 들어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주권을 지닌다는 것’, ‘실용주의’에서는 ‘실용성, 가용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식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당연히 ‘자본’ 즉, 돈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시장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화폐가치로 치환되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돈을 보유한다는 것은 곧 많은 것을 누릴 힘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왜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바라는가? 그래야 더욱 많은 돈을 벌고, 더욱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부의 축적’이라는 꿈을 꾸게 해 주었다. 그 꿈을 이룰 길은 거대한 벽을 쌓아 막아놓았으면서 말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 꿈에 도달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후반부의 파국 이후 쌓아온 모든 것에 가족까지 잃은 기우는 절망에 빠지는 대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돈을 버는 것. 많은 돈을 벌어 박사장네가 있던 저택을 사들이고 아버지와 재회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런데 기우에게 그 꿈을 이룰 힘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을 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또한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취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선발되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야만 한다. 사회에서 우리의 가치는 성적이라는 수치화된 자료로 표현되기 때문에, 높은 액수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성적이 요구된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적을 올리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나름 합리적이며 기회 평등한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할까? 높은 성적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피나는 노력만이 아니다. 고액의 학원비를 지불해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남들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개 교육비와 성적은 정비례 관계를 이룬다. 그러니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정말로 기우에게 꿈을 이룰 힘이 있을까?


사회는 유기체다. 단순히 구성원들의 집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존하기를 원한다. 사회의 죽음이란 곧 혼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 사회는, 끊임없이 노동하여 경제를 순환시킴으로써 사회의 하부구조가 되어줄 존재들을 필요로 한다.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가질 수 없는,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 꿈을 꾸며 버티는 존재들, 바로 노동자들이다.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희망은 일종의 비전으로 해석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달콤한 꿈을 보여주어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함으로써 통제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생충인가? 영화 속 기택의 가족과 박사장네의 관계는 흡사 기생충과 숙주의 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기생’했다고 볼 수 있을까? 공생의 한 종류인 기생은 어느 한쪽이 이득을 보며 다른 한쪽은 피해를 입는 관계를 뜻한다. 다시 말해, 숙주에게는 필히 기생체에 의한 어떠한 피해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는 기생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극의 흐름이 바뀌기 전 중반부까지, 두 가족의 관계는 윈윈(win-win)처럼 보였다. 한쪽은 돈을 벌 수 있었고, 다른 한쪽은 과외 선생님과 사용인을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거짓을 기반으로 쌓였고, 때문에 겉으로는 상생처럼 보일지언정 박사장네에게 기택 가족은 잠재적 피해 요소였다.


그들은 기생충이다. 하지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지, 기생충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가 기생충이라는 것을 숨겨야만 했고, 숙주의 몸속에서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숙주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빛나는 태양 아래에 서고자 했지만, 결국 구충제 한 알에 쓸려 내려가듯 저 깊은 반지하로 떨어질 뿐이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기우는 계속해서 계획을 세워왔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 한편에서 이미 알고 있다. 기우가 열심히 빵 부스러기를 모은다 한들, 누군가는 그 시간에 빵 몇십 덩어리를 구워낸다는 것을. 기우의 계획이 이뤄질 날, 그가 아버지와 다시 만날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계획을 세웠고, 그렇게 희망을 끌어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기생조차 할 수 없게 된 기생충은 그저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모으는 것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의 모든 것을 자신이 세운 계획이라 믿으며 사회의 연명을 위해 그 한 몸을 불살라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부유한 것도 죄가 아니다. 영화는 두 계층의 가까이에서 그들의 겉과 속을 관찰하며 그들 모두 회색지대에 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태도를 통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인물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영화 속에 담아냈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어쩌면 우리는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생충>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좌절감도 노동자에 대한 조롱도 아니다. 영화는 냉철한 시선으로 사회를 고발하며, 기생충과 숙주로 나뉘지 않는,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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