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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12. 2019

잘 못 찍힌 방점, <걸캅스>

필요했던 문제 제기, 그러나 경솔했던 해결 방안

나도 다음에 도심공항 이용해봐야지.

영화를 보고 유익했던 단 하나, '경찰에게 쫓길 정도로 급할 땐 도심공항을 이용하자'




영화 <걸캅스>는 상반기만으로도 다사다난했던 2019년 한국 영화계의 굵직한 이슈들 중 하나였다. ‘한국 영화 100주년’, ‘영화 흥행의 척도 UBD(엄복동)의 발견’,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등과 함께 <걸캅스> 또한 미디어에서 하나의 신드롬으로 크게 다루어졌다. <자전차왕 엄복동>이 신조어와 역사 왜곡 논란으로, 그리고 <기생충>이 세계적인 성과로 주목받았다면, <걸캅스>에는 성별 전쟁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분야를 막론해 ‘여성’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페미니즘’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아니, 이 부분은 정정이 필요하겠다. 더 이상 논박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상대방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혐오만이 오갈 뿐이다.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비난만이 호응을 받아 살아남았다. 논리는 감정에 묻혀 격양된 대중의 눈과 귀에 닿지 못하고, 그렇게 혐오의 소용돌이가 점점 커져간다. 이러한 격정의 시대에 <걸캅스>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개봉되었다. (<기생충> 이후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때마다 자꾸 송강호 배우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화를 보는 그리고 글을 쓰는 나의 태도에 대해 확실히 해놓고자 한다. 나는 굳이 비판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설령 영화에 아쉬움이 남더라도 본래 기대했던 부분이 충족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예를 들어 실사판 <라이온 킹>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동물들의 사실적인 묘사였기에, 그들의 표정이 어색했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의 범위를 넘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겠지만, 일부로 단점을 찾기 위해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나는 절대 누군가 혹은 어떠한 집단을 혐오할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9년 초, 영화 <캡틴 마블>이 개봉할 당시에도 <걸캅스>와 비슷한 양상의 대립이 있었다. 물론 전자의 경우 논란의 중심이 주인공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에 있었지만, 두 영화 모두 ‘여성’을 중심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전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당시에 내가 <캡틴 마블>에 느꼈던 감정은 무엇보다도 아쉬움이었다. 전력 증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가 등장할 명분은 타당했고, 흑인에 이어 여성을 이야기한다는 취지도 좋았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캡틴 마블 대신 스크럴 종족을 비췄고, 영화 속 액션은 단조로웠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영화가 아닌, 영화 밖 페미니즘에 열을 올리기에 바빴다. 때문에 캡틴 마블의 데뷔는 온전히 빛나지 못했고,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2019년 8월 12일 기준 네이버 영화 평점 분포


여러모로 유사한 상황이었던 <걸캅스>에 대해서도 영화를 보기 전까지 걱정과 아쉬움이 있었다. 영화 자체가 아닌 페미니즘에 기반을 둔 찬양과 비난으로 둘로 나뉜 포털 사이트의 평점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렇게 피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분명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따로 있을 텐데, 대체 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걸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에 대해 나름의 궁금증과 기대를 안고 있었다. 영화의 화법이 조금 서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남성 경찰에 익숙해있던 우리가 영화에 어색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기 전 아니, 전성기의 '박미영(라미란)'이 범인을 때려잡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믿음을 놓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영화 밖 논란들에 가려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무언가가 혹시라도 있을까, 그런 걱정을 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부터 반성해야만 했다. 여성을 중심에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유를 찾으며 영화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나도 페미니즘에 반응해 맹목적으로 열을 내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비판했던 사람들과 나의 모습이 겹쳐짐을 느낀 순간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걸캅스>에 담겨 있는 것과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신념이 있고, 그에 따라 페미니즘 역시 다양한 갈래로 나뉘어 해석될 수 있다. ‘각자의 페미니즘’이 내가 강조하는 문구이기도 하고 말이다. 분명 이 영화는 감독만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리라. 남성을 혐오하며 배척한 뒤 여성에게 전통적 남성성을 덧씌워 그 빈자리를 메우게끔 하는 것, 이것이 감독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인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소위 ‘미러링’이라 불리는 남성에 대한 조롱 섞인 모방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사회를 향한 메시지는 실종되고 감정적인 비난과 판타지적 해결책만이 남은 자위 영화에 불과했다.



성별을 통한 이분법적 선악 구도


<걸캅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영화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지닌 남성들이 모두 도움이 안 되거나 악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민원인을 친 트럭의 운전자도, 박미영과 구면인 범죄자도, 마치 몰카 영상을 공유하는 것처럼 묘사된 회사원들도, 그리고 본 작의 악역들도 모두 남성이다. 이에 더해 여성 경찰들과 달리 남성 경찰들은 실적에 눈이 멀었거나 잠만 자고 있으며, 박미영의 남편 '조지철(윤상현)'은 무능력한 걸림돌로 그려진다. 물론 이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연히’ 모든 여성 캐릭터가 정의롭고 ‘우연히’ 모든 남성 캐릭터가 악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개인의 선악은 성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작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명백히 의도적임을 드러냈다. 선악의 기준을 성별로 일반화한 것이다.


"이 새끼들, 개새끼들 아니야. 잠정적 살인자야!" - 박미영
"그거 다 지들끼리 좋아서 찍은 거 아냐? 네가 지금 여자라 더 흥분하……." - 오형사


작품의 후반부, '조지혜(이성경)'가 강력반 형사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며 외친 말들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그 자체일 것이다. 조지혜의 대사를 요약하자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고,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도와야 할 경찰들은 피해자가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경찰들이 부끄럽다.]

해당 장면의 앞 뒤 모두 자르고, 영상과 음성도 지우고, 글로 된 대사만을 읽었을 때, 나는 분명 조지혜라는 캐릭터에게 크게 감동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물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비슷한 사례들을 뉴스나 실제 경험 속에서 접해왔기에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어디까지나 그 ‘대사’만 따로 보았을 때 말이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도, 그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위급한 사람들도, 그리고 그런 이들을 무시하는 경찰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느 집단에나 사리사욕을 우선하는 극소수는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찰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절대다수의 경찰들은 민중의 영웅으로서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간혹 미디어에 보도되는 부패 경찰만으로 경찰 전체를 비난하는 것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걸캅스>는 어땠을까? 영화는 일반화를 진행하며 ‘남성’이라는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하였다. 여성 경찰들이 힘겹게 범죄를 추적할 때, 모든 남성 경찰들은 이기심에 빠져있었다. 이것이 <걸캅스>가 비추고 있는 세상이다.



영화는 꽤나 영악했다. 위 상황을 보여주기 직전에 어떤 장면들을 배치했고, 어떻게 연출을 했는지 떠올려보자. 박미영의 책상에 놓인 권고사직서, 병실에 누워있는 피해자와 그의 라이프사인을 나타내는 모니터. 이후에는 서글픈 음악과 함께, 불안과 걱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의 친구가 조지혜에게 건 통화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기적인 세상을 나타내려는 듯 채도가 낮춰진 경찰서는 차갑게 느껴졌고 그 속을 붉은 옷의 조지혜가 터벅터벅 걸어갔다. 실적을 올려 기뻐하는 남성 경찰들의 목소리는 페이드 아웃되었고, 그 자리에 여성 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자살을 다룬 뉴스 소리가 채워지며 강조되었다.


모든 것은 보는 이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짜여 있다. 물론 관객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동일시하는 것이 몰입의 기본이니 거의 모든 극작품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걸캅스>는 이를 관객에 대한 선동 수단으로 사용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지혜의 대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하고 정의로운 언사임에 틀림없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실제 현실 속 부패 경찰들을 떠올릴 것이고 이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바로 직전까지 여성이 피해자임을 강조해왔다. 불안에 떠는 여성과 웃으며 기뻐하는 남성.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대비되는 두 성별을 화면에 담으며, 이어지는 비판의 대상을 관객들이 ‘남성 경찰들’로 인식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결과에 묻힌 과정의 무책임함


애초에 근본적으로 조지혜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당시, 이유가 어떠하든, 징계를 받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놓고 간 스마트폰이 아니라 민원실을 찾아오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이는 박미영도 마찬가지인데, 심지어 그는 징계로 배정받은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본래 민원실 소속이었다. 민원실 소속의 경찰이 주어진 일이 아닌 다른 영역의 일을 한 것이다. 영화적 허용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히어로들은 소코비아를 파괴했다. 다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것 외에는 방법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들은 비판과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를 지켜야 하는 히어로가 무슨 이유에서든 도시를 파괴했으니 그 책임이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결과가 좋다고 과정이 무조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체계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범죄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박미영과 조지혜는 본인들의 가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행동이 올바른 선택이었으며 결과 또한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 그런 줄거리의 영화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너무나도 다르다. 모든 일이 정해진 플롯대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당연히 현실도 인과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지만, 현실의 인물들은 이야기 속 인물들과 달리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입체적이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나쁘다고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두 주연들이 영화가 아닌 현실의 인물이라고 해보자. 만능 해커 캐릭터도, 가는 곳마다 있는 정보 제공자도 없다. 그저 수상한 스마트폰에 이끌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민원실 공무원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둘이 나름의 시나리오로 의심 가는 누군가를 잡았다고 해보자. 만약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었다면? 영화 초반부 신촌에서의 조지철처럼 단순히 오해를 받은 거였다면? 영화는 답을 내놓는 과정에서 감정에 호소하며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걸캅스>는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지닌 영화다. 여성이 억압받고 범죄의 표적이 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안타깝고 하루빨리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을 지닌 영화가 제시한 해결 방안은 너무 경솔했다.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영화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판타지적 해결법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 과연 이 영화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영화에 페미니즘이 담기기는 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내게는 그저 성별 혐오를 부추기기 위한 불쏘시개에 불과했다고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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