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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19. 2019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다, <우리집>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감독님의 전작인 <우리들>을 보며 그 쓰라림과 따스함에 눈물을 흘렸었기에, 이번 작품인 <우리집> 또한 많은 기대를 안고 기다렸다. 이제 눈물이 나오리란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읽었던 그 순간부터 이 영화에 나를 겹쳐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볼에서 눈물이 마를 틈이 없었다.


영화를 보며 자꾸만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아 영화 속 아이들의 상황으로부터, 내 어린 시절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와도 같은 감정이 벅찰 정도로 불쾌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직 나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변할 때까지 다들 기다리고 지켜봐 주었듯이, 나도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우리집>은 불안과 욕심에 빠져있던 ‘내’가 타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되어 이를 극복해가는 이야기다.



집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주택의 이미지, 아마 ‘집’이라는 단어만 홀로 쓰인 경우에는 주로 이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나 ‘너희’와 같은 관형어가 결합되어 ‘우리 집’이 된다면, 단순히 ‘내가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 집 식구’를 줄여서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는 두 가정의 모습이 비친다. 12살 ‘하나(김나연)’네 집은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 부모님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다. 안 그래도 직장 일이 바빠 오래 같이 있지도 못하는 엄마와 아빠인데, 겨우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 시간에 밥 대신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하나의 걱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하나는 매일 식탁 가득 저녁을 준비하고 부모님께 “같이 밥 먹자”라고 말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고함에 묻힐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는 또 홀로 밥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던 하나는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 자매를 만나게 된다. 일 때문에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셔서 단둘이 옥탑방에서 생활하고 있던 유미와 유진에게 하나는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었고, 친구가 된 세 사람은 마치 친자매처럼 하루하루를 웃으며 보냈다. 비록 집에 돌아가면 다시 걱정이 밀려오겠지만, 셋이 함께 있을 때만큼은 하나도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네 집에 트러블이 있듯이 유미와 유진도 집의 문제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이사를 가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전에 <러브리스>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별거를 하고 계셨기에 나는 두 분이 다투는 장면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고, 그때에는 그냥 다들 그런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도 어느 날에는 엄마랑, 어느 날에는 아빠랑, 이렇게 번갈아가며 지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우리 집은 항상 그래 왔으니까. 그러다 교과서를 보고 TV를 보며 ‘정상’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우리 집이…… 아니, 나의 집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그때의 나도 하나처럼 12살이었다.


이번에는 <러브리스> 글에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중학교 1학년에 두 분이 이혼하셨음을 알게 된 이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의 목표는 오직 엄마와 아빠를 다시 부부 관계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애초에 나는 두 분이 아직 부부였을 때의 모습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 먼 옛날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냥 그래야만 한다고 느꼈다. 내가 ‘정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둘이 만날 자리를 계획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민법전까지 읽었었다. 참으로 이기적이다. 그때의 내게는 오직 나뿐이었다.


내 세상에는 오직 나만이 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 역할만이 존재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정말 사랑하긴 했던 걸까. 그저 내게 정상적인 가족을 만들어 줄 ‘엄마’, ‘아빠’라는 역할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그때의 내가 밉다.

그랬던 나를 기다려주신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다.




영화 속 하나는 계속해서 가족여행을 가고자 했다. 이전에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나빴을 때,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로 사이가 다시 좋아졌기에, 이번에도 여행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아빠의 핸드폰으로는 모르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오고, 엄마의 서류봉투에는 독일로 떠나기 위한 준비 서류들이 담겨 있었다. 결국 ‘이혼’이라는 말까지 들어버린 하나에게는 이제 여유가 없었다.


감정은 격해지고, 다른 누구의 일보다 지금 자신이 직면한 일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유미 자매를 돕는 것보다 우선은 자신의 집을 지키는 게 우선될 수밖에 없다. 하나만이 아니라 유미 또한 자신의 일을 더욱 크게 느꼈을 것이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정말로 눈을 감고 싶었다. <우리들>이나 <주먹왕 랄프 2>에서처럼 스크린이 거울이 되어 다가올 때에는 너무나도 괴롭다.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떻게 나만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마을을 세울 수 있었을까. 사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그냥 세상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간 것 같다. 이혼을 한다고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이사를 간다고 우정이 끊기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습은 변하겠지만 그럼에도 정말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밥 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 준비하자.

영화의 마지막, 하나는 평소처럼 식탁에 밥을 차려놓고 모두에게 위처럼 말했다.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며 하나가 성장했다고 느꼈다. 아마 머지않아 부모님은 이혼하고 가족은 흩어질 것이다. 하나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세상의 전부인 나의 집이 무너질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스스로가 만든 '나'라는 경계뿐이었다. “우리가 이사 가도 언니는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는 유미의 물음처럼 하나도 그 순간 이해한 게 아닐까.


하나와 유미가 다툰 이후 다시 화해하고 웃을 수 있게 된 곳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홀로 남겨진 텐트였다. ‘우리 집’은 장소도 형태도 무엇하나 정해진 곳이 아니다. 나와 누군가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면,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그들의 따뜻한 집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고민해봤을 법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그러나 기억 저편에 덮어두고 잊고 살았던 그 시절 나의 모습을 영화는 다시 한번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순수하고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준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신 감독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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