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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26. 2019

병든 세상 속 작지만 힘찬 날갯짓, <벌새>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때를 살았던 그들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모두 한 명의 은희였다.


세상은 지독한 병에 걸렸다.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어 그들 모두를 환자로 만드는 병. 누군가에게는 위쪽만을 보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래를 깔보게 한다. 병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모두에게서 배려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배려가 사라진 사람들은 남을 상처 입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로 가득한 병든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킨다. 폭력, 배신, 그리고 이별. 우리도 병들어, 말 잘 듣는 앵무새가 될 때까지, 세상은 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배경인 1994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은 아직도 병들어 있다. 곪아 버린 상처들이 또 언제 성수대교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세상은 치유될 수 있을까? 공장처럼 사람을 재단하고 'SKY'와 '돈'이라는 목표를 강요하는 우리들의 세상은 사실 처음부터 병들어 있던 게 아닐까? 아무리 손가락을 움직여봐도 내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고 함께 병들어 가는 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은희는 달랐다. 아니, 그도 처음부터 다르지는 않았다. 오빠의 폭력에 그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고, 친구의 배신에 새로운 친구로 아픔을 덧씌우려 할 뿐이었다. 부조리로 가득한 가정에서도 침묵하며, 세상이 주는 고통에 맞서고자 하지 않았다. 그때의 은희는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일개 개인인 자신이 목소리를 내도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다고 말이다. 뜻을 모아 투쟁한 재개발 철거민들마저도 더 큰 목소리에 눌려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끝없이 닥쳐오는 상실은 은희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를 낼 힘을 빼앗아갔다.



그러던 은희의 앞에 영지 선생님이 나타났다. 선생님은 작게나마 꺼낸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에게 날개를 펼칠 힘을 보태주었다.



집보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하는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은 자신도 그렇다고 답했다. 왜 두 사람은 병원을 좋아했을까? <벌새>를 보며 거의 모든 순간 얼굴에서 일그러짐이 지워지질 않았었다. 스크린에 비치는 병든 사회의 모습과 그 속에서 상처 입어가는 은희의 모습에 불편함이 밀려왔었다. 하지만 오직 병원에서는, 은희가 병원에 있는 장면에서는 불쾌감을 누그러뜨리고 조그마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건 어째서였을까?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병원은 다치고 병든 곳을 말끔히 치료해주는 곳이다. 학교도, 가정도, 사회도, 모두가 경쟁을 강요하고 타인과 스스로를 상처 입히게끔 했지만, 병원이라는 공간 속 사람들은 바깥과 달랐다. 병원 밖 학생들의 수군거림은 남을 향한 조롱이었지만, 병원 안 아주머니들의 속삭임은 귀여운 상상이 곁들여진 칭찬과 격려였다. 이 침대 저 침대를 돌아다니며 매실 장아찌를 건네주던 아주머니의 모습처럼, 그곳에는 경쟁이 없었다. "나만 건강해져서 먼저 퇴원해야지!" 같은 마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고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나 하나만을 위하며 살아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은희도 다르지 않았다. 삼촌의 죽음에 슬퍼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남자 친구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후배를 옆에 두고 남자 친구에게 발걸음을 향했었다. 은희의 세계에는 은희뿐이었기에,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병원에서 막 퇴원한 은희는 이때의 모습과 그리 많이 바뀌지는 않았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몇 차례의 상실과 더 마주하고, 영지 선생님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은희는 비로소 날개를 펴게 된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부조리와 폭력에 목소리를 내며,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영화의 후반부 식탁에 앉아 엄마와 교감하는 장면은 단연 가장 묵직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나쁜 일 뒤에 반드시 좋은 일이 따라올지도,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웃음을 나눈 병원 아주머니들처럼, '진단서'를 권해준 새서울의원의 선생님처럼, 그리고 더 이상 침묵하고 상처입지 말라고 말해준 영지 선생님처럼, 우리도 주변을 둘러보고 배려하며 연대한다면 분명 언젠가 이 병든 세상도 치유될 것이다.


위계 속에서 나는 작은 벌새에 불과하지만, 그 힘찬 날갯짓이 모여 만들 바람은 결코 작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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