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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06. 2019

아름다움의 빛과 그림자, <서스페리아>

프로파간다의 민낯을 비추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빠져들고 말 때가 있다. 마치 누군가의 매혹적인 피리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듯이, 아기 천사의 화살이 가슴에 날아오듯이. 이 순간 우리 마음속에 일렁이는 끓어오름은 분명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라는 말처럼 때로는 이성적 판단보다 순간의 감정을 따라 선택하게 되는 상황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따른 것일까?


당연히 이성적인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오히려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판단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만약 그 감정이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심어진 것이라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양감이 타인의 의도로 유도된 것이라면, 그래도 그것을 ‘나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란 청자를 설득 – 보통 선동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 하여 동의를 구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소비자에게 제품을 광고하여 구매를 유도하는 것도, 대중을 상대로 특정한 이데올로기(이념)를 전파하려는 것도 모두 선전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데,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저널리즘으로, 그리고 물론 영화를 통해서도 퍼져나간다. 영화 관람은 오로지 스크린에만 집중하게끔 설계된 극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 매체에 비해 비교적 쉽고 깊게 미디어의 내용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니 프로파간다의 주체들에게 영화는 매력적인 수단일 수밖에 없으리라.


프로파간다 영화는 정치와 문화가 존재한 모든 역사 속에 존재해왔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무엇이 있으랴, 소위 ‘국뽕(국가+히로뽕) 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은 선전물의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들은 대체 어떻게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고를 왜곡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원하고 그것에 끌린다. 오감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각각이고, 개인별로 아름다움의 척도 또한 제각각이지만 우리는 결국 아름다움으로부터 쾌락을 얻는다. 여기서 프로파간다는, 말하자면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을 덧씌우는 작업이다. 무언가 더없이 아름다운 장치를 통해 그것과 연결된 대상마저 아름다운 것이라 인식하게끔 만드는 것, 일종의 최면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어쩌면 의문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건 그런 건데 대체 왜 제목의 영화 리뷰는 하지도 않고 계속 프로파간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서스페리아>가 프로파간다 영화인 걸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에 구태여 서론의 길이를 늘이면서까지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지독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으로 관객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풀었다 반복하며 우리가 프로파간다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게끔 한다.



영화는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1977년의 독일을 비추며 시작된다. 서독의 극좌 테러집단인 독일 적군파(RAF/바더-마인호프)를 석방하라는 시위대 사이로 ‘패트리샤’라는 소녀가 ‘클렘페러’ 박사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패트리샤는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며 박사에게 마녀의 존재에 대해 경고하지만 박사는 이를 모종의 망상으로 여기며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기록했다. 이후 비로소 영화의 주인공 ‘수지’가 등장해 베를린의 댄스 아카데미에 도착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막이 오른다. 그는 천재적이다. 불합리한 오디션을 실력으로 압도했으며 무용단에 들어오자마자 센터에 올랐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의 권위자인 ‘마담 블랑’의 총애를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런데 수지가 들어온 아카데미에는 다른 곳에 없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패트리샤가 말했던 마녀의 존재, 제물로 바쳐지는 학생에 대한 소문, 그리고 사라진 학생들.


클렘페러 박사는 마녀를 믿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집단을 만들고, 자신들이 벌이려는 일을 마법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믿는다고 덧붙였다. 박사의 말처럼 현실 세계에는 마녀도 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들의 세상에는 악마가 있었다. 마법과 같은 말로 우상의 자리에 올라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악마,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 영화 속 댄스 아카데미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와 같다. ‘마더 마르코스’라는 우상의 소망을 위해 학생들을 착취하고 청중을 현혹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차 대전 이후 나치가 몰락하고 비로소 그들의 끔찍한 만행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하켄크로이츠나 나치식 경례는 물론이고 나치 및 히틀러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 역사적 서술이나 이들을 풍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 금기시되어 왔다.

우선 이야기에 앞서, 나는 히틀러와 나치의 행적 및 사상을 옹호할 마음 따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럴 가치도 필요도 느끼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니 조심스럽게나마 이야기해보자. 나치의 전략에 대해, 그들이 만든 아름다움에 대해.


나치 독일 시기의 독일군 장교복과 친위대 군복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매우 세련되었다. 마치 정장과 같은 스타일의, 전쟁에서의 실용성보다는 이미지를 브랜딩하는 것에 중점을 맞춘 듯한 디자인은 많은 독일 청년들을 매료시켰고, 그들에게 나치에 대한 긍정적인 연상을 심었다. 또한 그들이 제복과 국기 등에 사용한 색의 조합은 검은색이 주는 카리스마와 붉은색이 내뿜는 강렬함이 맞물려 보는 이로 하여금 쾌감의 폭발을 경험케 하며,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것으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민족주의적 가치를 고취시켰다. 즉, 나치는 철저하게 자신들을 아름답게 포장했으며, 이는 실제로도 유효했던 것이다.



이는 영화 <서스페리아> 속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는데, 무용단의 공연 작품 ‘Volk’가 대표적이다. ‘Volk’는 독일어로 ‘민족, 국민’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운 히틀러의 사상과 상통된다. 작품의 안무는 신체의 직선을 활용하여 마치 나치식 경례를 연상케 하듯 매우 절도 있었는데,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며 군무가 펼쳐지는 신(scene)에서는 그 에너지가 수배로 증폭되었다. 이 군무 장면에서 무용단의 몸에는 붉은 밧줄이 둘러져 있고, 작품의 중심인 수지의 얼굴엔 흰색과 검은색의 선이 그어져 있다. ‘흑, 백, 적’은 현재 독일 국기의 ‘흑, 적, 금’과 다른 독일 제국 시기의 국기 색상이며, 이 국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폐지되었다가 1935년 하켄크로이츠 이전까지 2년 간 나치 독일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상 자체의 색상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색이 바랜 듯 음울한 배경색은 붉은색과의 대비로 무용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해당 장면에서 무용단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모두 그들의 춤에 빠져들어 있었다. 때문에 ‘사라’가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아름답지만 분명 기괴한 그들의 공연에 불편함을 느끼고 사라가 쓰러지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클렘페러 박사다. 나치에 의해 아내를 잃고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아가는 자만이 그들의 환상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우리는 어땠을까? 아마 대부분의 (현실의) 관객들이 오직 아름다움만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들에게 빠져들었을지언정 영화 속 관객들과 달리 우리는 불편함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결코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니니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풀었다 반복한다. 무용단이 보여주는 환상에 우리를 노출시키면서도, 우리가 그 속으로 빠지려는 찰나에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영화임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사용된 것이 바로 ‘소격 효과’인데, 이는 극 외부의 관객과 극 내부의 등장인물을 분리시켜 관객이 극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비판적인 관점을 잃지 않도록 하는 극의 연출 기법이다.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관객을 주인공과 동일시시켜 그가 느끼는 감정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인지하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전의 전율도, 신파의 감동도 극에 몰입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분명히 몰입은 우리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지만, 왜곡된 가치관을 지닌 인물과의 동일시는 자칫 우리 스스로의 관점을 흐리고 우리를 프로파간다의 먹잇감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판적인 수용자로서 창작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사 속 가장 뛰어난 다큐멘터리 영화를 뽑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의지의 승리>라 말할 것이다. 1934년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이 영화는 오직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나치즘을 전파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때문에 영화와 감독 모두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일단 영화는 제 목적을 충실히 달성했다. 구름을 가르며 비행하던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히틀러의 모습은 그야말로 메시아의 강림이었고, 로우 앵글로 잡힌 그에게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대학 영화 강의에서 처음 <의지의 승리>를 보았을 때, 나는 이제껏 경험한 적 없었던 격렬한 끓어오름을 느꼈다. 분명히 머리로는 알고 있을 텐데, 이는 연출이 가미된 영화이며 그는 악마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문자 그대로 ‘선동’되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을 <서스페리아>에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선동되었다. 하지만 재차 말하지만 <서스페리아>는 결코 선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영화는 관객을 위한 불편함으로 가득하다.



처음 시작부터 화면에는 ‘Act One(1막)’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영화는 6개의 막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졌는데, 막이 바뀔 때마다 마치 연극에서 커튼으로 막을 구분하듯이 화면에 자막을 띄워 관객에게 알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막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구분되어 표시되는 자막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현실이 아님을 알리는 기능을 하게 된다. 또한 극중에서 주인공 수지와 마담 블랑은 카메라를 직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관객과 영화의 경계를 뚜렷이 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스크린 앞에 앉은 관객은 일종의 관음증적 방관자가 된다.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지는 않지만 그들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제3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에서 직시하여 우리와 시선이 충돌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게 되어 이야기 속 제3자의 지위를 잃고 이야기 밖으로 튕겨나가게 된다.


여기에 더해 소격 효과를 일으키는 요소로 카메라의 줌 인(zoom in)도 활용되었는데, 영화를 보면 마담 블랑과 수지의 첫 대면 장면에서처럼 갑작스러운 줌 인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줌 인을 하며 때로는 지나치게 먼 거리를 확대하거나 화면을 흔들어서 어색함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화면의 어색함은 관객에게 시각적 불편함을 일으키고, 결국 관객은 몰입을 방해받게 된다. 이렇듯 <서스페리아>는 다른 프로파간다 영화들의 전략을 따르는 동시에 한 편에서는 소격 효과를 활용하여 관객이 직접 선동의 힘을 경험하며 그 위험성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는 프로파간다의 민낯을 비추는 결정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 수지의 본모습, 마더 서스페리아다. 마르코스는 부활이라는 자신의 소망을 위해 추종자들과 함께 의식을 준비했다. 학생들은 제물이 될 것이고 수지는 마르코스의 새로운 신체가 될 것이었다. 마르코스는 무용단을 자신의 야욕을 위해 휘둘렀고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왔다. 이에 잘못된 우상을 단죄하고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그곳에 태초의 어머니, 마더 서스페리아가 내려왔다.


마르코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나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마더 서스페리아는 곧 독일의 올바른 국가정체성이며, 이후 벌어지는 마르코스파의 숙청은 나치 독일에 대한 청산과 새로운 독일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마더 서스페리아는 나치(마르코스)에 의해 상처 받은 자들에게 구원자가 되어주는데, 희생된 패트리샤와 사라에게 영원한 안식을 내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클렘페러 박사에게는 진실을 들려준 뒤 그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했다. 즉, 영화의 제목인 마더 서스페리아는 직접 거짓된 선전을 끝내고 그 희생자들을 비춤으로써 관객들에게 프로파간다의 실체를 보여주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는 지독하게 아름답다. 뒤틀려 으스러지는 신체도, 악몽 속 기괴한 이미지도, 심지어 마지막 피의 숙청마저도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무용단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마더 마르코스가 우리가 생각한 이미지와 달리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듯이, 히틀러의 감언이설이 실은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했듯이, 이 아름다움도 그저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나를 저들의 세상과 분리시켜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더라면, 어쩌면 나는 그들의 무대에 취해 그들에게 맹목적인 추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수많은 선전들이 생산되고 유포되고 있다. 삶 속에서 마주칠 그 손길들로부터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소격 효과라는 안전장치 없이 비판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히틀러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 이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않고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영화는 아름다움의 양면성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엔딩 크레딧 이후 쿠키영상에서 수지, 마더 서스페리아는 화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마치 그가 박사의 기억을 지울 때처럼. 마르코스를 벌하고, 박사를 트라우마로부터 해방한 수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We need guilt, Doctor. And shame. But not yours.
(우리는 죄책감이 필요해, 박사. 그리고 수치심도. 하지만 당신 건 아니야.)

마르코스와 그 추종자들이 벌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새로운 독일을 위해,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아픔을 치유해야만 했다. 마지막 수지의 행동은 스크린 앞에서 그들의 만행을 지켜봐 온 우리들에 대한, 그리고 현실 속 나치 피해자들에 대한 마더 서스페리아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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