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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pr 13. 2019

아이가 돌아올 곳은 어디에, <러브리스>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까

All you need is love
(당신께 필요한 건 사랑이 전부예요)

비틀즈의 노랫말처럼,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은 현실과 드라마 속 수많은 연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었다. 그런데 정말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녕 사랑뿐인 걸까? 그렇지 않다. 사랑 하나로 버티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때로는 사랑보다 ‘돈’이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의미를 잃은 것은 결코 아니다.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었다 한들 딱 하나, 사랑이 없다면 관계는 계속될 수 없다. 언젠가 분열되고, 끝내 단절된다. 그러니 사랑이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화 <러브리스>는 제목처럼 ‘사랑이 없는’ 부부, ‘제냐’와 ‘보리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한 어떠한 사랑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둘은 새로운 사랑을 찾았으며 이혼을 준비했다. 영화가 이대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면 아무런 특이점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들에게는 열두 살짜리 아들 ‘알료사’가 있었고, 제냐와 보리스 모두 아이를 원치 않았다. 자신의 물건은 자신이 가져가고, 같이 살던 집은 매매금액의 절반을 나누어 가지면 된다. 실로 간단명료하고 깔끔한 방침이다. 그럼 아이는? 솔로몬 왕처럼 아이를 반으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되면 반쪽은 자신이 맡아야 하니까. 사랑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는 아이는 새 출발을 방해하는 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아이를 떠넘기려 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알료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소리 없이 울고 있던 걸까?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료사가 눈물을 흘리고, 끝내 집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더 이상 그곳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겐 꿈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로망이 있었다. 저녁이 되면 엄마, 아빠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것. 교과서 속에도, 드라마 속에도, 심지어는 만화 속에서조차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즐겁게 밥을 먹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어째서 우리 집은 그렇지 않은 걸까, 항상 생각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드라마 속에서 나와 같은 상황의 아이를 찾았고, 그 아이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주변 어른들에게 부모님의 이혼 여부에 대해 물었으나,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라는 괜한 꾸지람뿐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얼마 후,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며 나에게 아빠와 이혼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의 난 너무나도 슬펐고 그 이상으로 화가 났었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참 이기적이었다. 두 분의 마음이 어떠하든 내가 그렸던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가 깨졌다는 것만을 생각해, 멋대로 좌절하고 멋대로 분노했다. 이렇게 글로 적기에도 – 결국 적었지만 – 부끄럽고 한심한 과거다.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혼은 죄가 아니고, 두 분은 여전히 날 사랑하시는 나의 엄마와 아빠라는 걸 깨달은 건 그 후 몇 년의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의 이야기다.

“사람은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후 내게는 이 생각이 깊이 자리 잡았다. 여전히 사회에는 이혼에 대한, 특히 ‘이혼 여성’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가. 때문에 나는 이혼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행복을 위한 그들의 선택이리라. 마찬가지로 알료사도 사랑이 상실된 그곳에서 벗어나 사랑을 찾으러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알료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올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맴돌아도 그곳엔 더 이상 자신을 받아줄 사랑은 없었으니 말이다. 카메라는 관객의 눈이 되어 우리가 영화 속 세상을 둘러볼 수 있게 한다. <러브리스>의 카메라는 사랑이 사라져 가는 세상을 느릿하고 무겁게 좇으며, 때로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제자리에 멈추어 인물들이 모두 떠난 빈 거리를 담았다.

마치 사랑 대신 상처를 받은 아이의 시선처럼,

사랑이 사라진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처럼.


이혼은 분명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은 단순한 이기심의 발현에 불과해진다. 제냐와 보리스는 서로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아이를 향한 사랑까지 버렸다. 그들은 '아이가 돌아올 곳'을 그들 스스로 없앤 것이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무지개 너머 어딘가...)

또 다른 노랫말처럼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는 사랑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무지개가 피기 위해서는 충분한 햇빛과 물방울이 필요하고, 때문에 춥고 건조한 겨울보다는 여름의 장마철에 더 자주 관측된다. 아이는 사랑으로 가득한 무지개 너머를 향해 떠났을 수도 있지만, 과연 얼어붙어 가는 세상에서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세상이 무지개로 가득할 순 없을지라도 부디 어딘가에서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세상으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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