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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pr 07. 2019

정말 아이를 위한다면, <나의 작은 시인에게>

성급함보다는 대화와 기다림을

우리는 흔히 아이는 미성숙하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어려서, 경험이 부족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는 미성숙하고, 그렇기에 어른들이 나서서 아이가 올바른 길을 걷도록 방향을 알려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성숙하다는 것이 곧 무능력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한다. 분명히 아이는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며, 세상 물정도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어른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보는 세상이 너무나도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을까? 아이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일인 걸까? 어른의 잣대만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있던 건 아닐까.


아이는 누군가가 실을 당겨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혹여나 아이가 딴 길로 새진 않을까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 아이도 방향을 찾을 수 있음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또한 아이를 향한 사랑이다. 때로는 아이가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 아이에겐 그 또한 거름이 될 테니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어린이집 선생님인 ‘리사’와 다섯 살의 작은 시인 ‘지미’의 이야기이다. 시를 좋아하지만 재능을 갖지 못한 리사는 어느 날 자신의 학생인 지미에게 천재적인 시적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리사는 지미의 재능에 집착하고 그 재능을 살려 그를 시인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지미라는 작은 천재의 날갯짓을 통해 리사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미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다. 주변 아이들은 문학적 소양과는 거리가 먼 나쁜 말을 사용했고, 지미의 보모는 그의 재능을 간과하며 그를 그저 아이로만 대했다. 심지어 지미의 아버지는 ‘시인’이라는 직업 자체에 반감을 드러내며 지미가 – 경제적으로 -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지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그의 시적 능력을 저해시키고 그를 천재에서 범인(凡人)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때문에 리사는 지미를 그런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했다. 아이가 재능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나아가도록, 나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아주 어렸을 때,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색연필을 꺼내 들고 8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그렇게 행복했다. 그림을 다 그리면 도화지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며,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겠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난 ‘화가는 가난한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쥬라기 공원>을 본 뒤로는 고고학자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인터넷에 ‘고고학자 되는 법’을 검색한다던가, 대학의 어떤 학과를 졸업해야 하는지 등을 조사하며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었다. 그런데 언제였을까, 나는 ‘고고학자도 가난한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작가가 꿈이었다. 소설 속 세상에 빠져있었고, 내게 재능도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공모전은 물론 교내 백일장에서조차 입상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재능이 있다고 믿었으나, 내가 보는 세상은 우물 안쪽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꿈도 어디론가 흘러갔고, 그 빈자리에 ‘막연히 영화 쪽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누군가는 내게, 처음부터 그 일이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니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말하면서.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그때의 난 어렸고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냥 그림이, 공룡이, 소설이, 그리고 영화가 좋았을 뿐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경제성이나 재능과 같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그때마다 방향을 수정하고 선택을 바꿔왔다. 어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어리기에 여러 선택을 해보고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찾아갈 시간이 있었던 게 아닐까.



영화 속에서 지미에게 리사는 ‘꿈’을, 아버지는 ‘현실’만을 강요했다. 아직 다섯 살인 아이의 미래를 벌써부터 정해놓으려 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나처럼 여러 꿈을 꾸진 않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하나의 목표를 설정해 그 골(goal)을 향해 차근차근 달려 나가는 아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건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 선택의 주체는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니라 아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사와 아버지 모두 지미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지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본인들의 행복만을 좇았다. 지미를 천재 시인으로 키워내겠다는 성취감, 지미에게 평범함을 요구하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여유. 이들이 지미를 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이 지미를 위하는 궁극적 목적이 지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지미는 리사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어른들이었으니까. 다섯 살 아이는 어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의 손과 발에 밧줄을 감아 그들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려 할 뿐,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리사가 듣고 싶었던 건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그 아이가 읊는 시뿐이었으니까. 클럽 경영 때문에 바쁜 아버지에게는 손이 가지 않는 아이가 필요했으니까.


‘어른의 역할’이라는 건 아이의 길을 대신 정해주는 게 아니라, 아이와 대화해 훗날 그 아이가 하게 될 선택을 지원해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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