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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24. 2019

믿음이 있으라, <우상>

정의로운 자는 누구인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의 13장은 ‘사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름이 상징하듯 13장의 1절부터 13절은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에게 사랑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 왔고,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격정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리가 사랑을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있어, 우리가 사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믿음의 유무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기에 비로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줄 여유가 생기고, 사랑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 중 으뜸이 사랑이라면, 그 숭고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망 또한 그것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믿음이라고 해석한다면, 셋 중 으뜸의 힘은 믿음의 힘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믿음의 힘이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강력한 힘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내일을 꿈꿀 소망과 오늘을 함께할 사랑을 지니게 하지만, 동시에 그 거대한 몸집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진실을 왜곡시킨다. 믿음에 빠진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 그리고 이들의 어긋난 믿음은 그들 마음속에 정의로운 자, ‘우상’을 탄생시킨다.


*이 앞에는 <우상>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무교입니다.)


어느 한 가을날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인물들은 엮이고 영화는 시작된다. 명망 있는 정치인 구명회(한석규)는 아들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인해 도지사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정치인생 최대의 트러블에 맞닥뜨린다. 그와 대치하는 인물인 유중식(설경구)은 철물점을 운영하는 소시민으로, 교통사고의 피해자가 되어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과 맞닥뜨린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의 아내인 최련화(천우희)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외지에서 생존의 위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달랐던 이들이 교통사고라는 하나의 실로 이어졌고, 그 속에서 각자 자신들의 우상을 믿으며 쫓고 쫓기는 전장의 문을 열었다.


영화 속에서 명회와 중식은 사고의 진실을 두고 서로 대치하는 입장에 놓여있다. 명회의 아들, 요한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중식의 아들, 부남은 목숨을 잃었다. 사건을 알게 된 명회는, 본래 그가 청렴하고 올곧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의 정치 이미지를 위해서인지, 아들에게 당장 자수하라고 이야기하지만, CCTV 영상을 확인하던 그는 이것이 뺑소니가 아니라 살인사건으로 연결될 수 있음에 깨달았고, 진실과 다른 내용으로 사건을 공표했다. 이 소식은 피해자의 아버지인 중식의 귀에도 곧바로 전해졌고 그는 사건 내용에 있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부남과 함께 있었을 며느리 련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두 남자의 사라진 목격자 찾기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얽힌 이해관계와 감정선이 드러나며 이들은 각성하고, 타락한다.



중식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에게는 아들뿐이다. 정신지체가 있는 아들을 위해 그의 손으로 직접 아들의 자위를 도와줄 정도로 그는 아들이 전부인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어야 할 아들을 잃고 말았다. 아들을 빼앗아간 자가 정치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일까, 변호사들의 입에서는 집행유예의 목소리가 나왔고, 사라진 며느리의 행방을 찾으려 해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소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음속 우상이었던 아들을 잃은 그는 명회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스스로 뛰며 진실을 좇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진실에 도달했고 거짓된 우상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의 종착지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이었지만,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상이 과연 정말 진실된 것인지 되물어볼 계기를 남겼다.


그는 영웅인가?

우리의 존경을 받을 우상의 그릇인가?


아니다. 그는 무뢰한이다. 매우 독단적이며 충동적이고 이기적이다. 경찰을 믿지 못해 – 물론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 스스로 사건을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요한을 유도신문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상대가 경찰이든 자신의 누나이든 상관없이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날린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들을 잃은 분노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변호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그는 성매수 전과자이며, 철물점에서 그가 자신의 누나에게 휘두른 주먹은 중지가 날카롭게 세워진 밤주먹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올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중지를 세운다. 왜? 상대를 때리기 위해. 그것도 더욱 고통스럽게 때리기 위해서.


말했듯이 그는 소시민일 뿐이다. 우상이 되기에는 그의 그릇이 너무나도 작았다. 그곳에는 자기 자신과 아들만이 담길 수 있었다. 아들이 사라진 그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련화의 아이를 새로운 우상으로 택했다. 련화를 향한 중식의 선행 – 으로 보이는 행동 – 들은 어디까지나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지 결코 련화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다. 안마방 화장실 바닥에 차갑게 식어있는 태아를 보며 중식의 우상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순간 그가 이순신 동상에 테러를 감행한 이유는 어쩌면 대중을 향한 계몽의 횃불도,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우상을 잃은 자신의 분노를, 다른 이들의 우상을 파괴함으로써 표출한 건 아닐까.



<우상>은 영화의 마지막으로, 명회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소리로 청중들을 향해 강연을 하는 모습을 비췄다. 관객도 그리고 아마 그곳에 있는 청중들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들의 우상으로부터 나온 미지의 말씀에 맹목적으로 찬양을 보낸 것이다. 왜? 그를 믿으니까. 그가 나의 우상이니까. 내가 믿는 사람은 옳은 말밖에 하지 않으니까. 그가 우리의 윤리관과 부딪히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의 뒤로 미사곡 ‘아뉴스 데이(Agnus Dei)’가 울려온다. 라틴어로 ‘주의 어린양’이라는 뜻인 ‘아뉴스 데이’는, 점점 타락해가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그를 우상으로 추앙하도록 만든다.

자네, 예수야.

우리가 따르는 우상이 진실한 자인지, 정의로운 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과 정의는 우상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씀이 곧 진실이 되고 그의 의사가 바로 정의인 것이다. 때문에 우상에게 그러한 것들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드라마,

믿음을 심어줄 그것,

그를 ‘우상’으로 만들어줄 바로 그것.


잘못되었다고? 그야말로 우리 사는 세상이지 않은가.


할렐루야, 나의 우상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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