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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16. 2019

족쇄이자 열쇠,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우리에게 있어 언어란

언어는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더욱 우월한 존재로 여기며, 수많은 인간 찬가(讚歌)를 불렀다. ‘언어적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단어로, 인간은 동물 – 인간을 제외한 - 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물론 동물도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을 하고 있으며, 어느 침팬지는 수화를 배우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언어를 인간의 특징 중 하나로 보는 이유는 인지 혁명을 거치며 인간이 습득한 ‘허구를 말하는 능력’ 때문일 것이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머릿속의 상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언변가는 리더가 되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세상에 종교가 탄생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배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언어이다. 여기서 한번 정리하자면, 인간은 언어에 의해 지배당한다.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언어학자 마르틴이 멕시코의 토착 언어인 ‘시크릴어’를 연구하기 위해 밀림 속 마을에 발을 들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멕시코는 과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인해 실제로도 토착 언어 대신 스페인어가 주로 쓰이고 있으며, 많은 수의 원주민 언어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영화 속 가공의 언어인 시크릴어 또한 세상에 단 두 명의 공식 전수자와 한 명의 비공식 사용자만이 남아있는 사멸 위기 상태이다. 공식적으로 시크릴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등록된 하신타와 이사우로의 도움으로 마르틴은 이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시크릴어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들은 모두 노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신타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화 기록을 위해 다른 한 명의 시크릴어 사용자를 찾아야만 했던 마르틴은 결국, 요청을 거절하고 오로지 스페인어로만 이야기하는 시크릴어의 비공식 사용자 에바리스토에게 찾아가게 된다.


과거,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둘은 마리아라는 한 여자를 사랑했고, 에바리스토가 경쟁에서 승리한 뒤 둘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이사우로는 어떠한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나 은둔생활을 시작했으며, 두 친구가 서로를 만나지 않은 채 세월은 흘러 50년이 지났다. 마르틴은 시크릴어 연구를 위해 어떻게든 이 둘을 한 자리에 모으고 화해시키기 위해 양쪽을 오가며 설득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 얽힌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 앞에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나 50년 뒤의 미래를 보고 온 우리는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스페인은 절대적인 가톨릭 국가였다. 당연히 식민지인 멕시코에는 가톨릭 예배당이 세워졌고, 이곳을 중심으로 스페인은 토착 문화를 탄압하고 스페인어와 가톨릭 교리를 원주민 사회에 정착시켰다. 시크릴어만을 사용하는 이사우로와 달리 에바리스토는 시크릴과 스페인 두 개의 언어를 구사했고, 그렇기에 그에게는 가톨릭의 족쇄가 채워졌다.


이제 막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사우로를 만나러 예배당에 찾아간 에바리스토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환상을 보게 된다. 바닥을 흘러 그의 앞에 고인 핏물과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예수의 두 눈. 성직자는 에바리스토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타락은 숨길 수 없다.” 에바리스토는 교리를 어길 수 없었다. 금기를 범했다는 죄악감에 그는 마리아를 찾아가, “이사우로가 나를 몰아붙였다. 그가 너무 혐오스럽다. 나는 다르다. 나와 결혼해 달라.”라고 울부짖었다. 이로 인해 이사우로는 마을로부터 배척당했으며, 50년이 지난 뒤에도 마을 아이들에게 ‘미친 영감’이라고 조롱받게 된다.



위에서 나는 언어가 사람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스페인어는 에바리스토에게 하나의 족쇄가 되어 그가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는 것을 죄악시했다. 이후 ‘정상’이라 여겨지는 이성애적 세상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그는 시크릴어를 거부하고 스페인어만을 사용했으며, 항상 자신의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세상 속에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었다. 진짜 ‘나’를 지운 채 거짓된 삶을 이어온 것이다.


영화는 시크릴어와 스페인어의 대비를 통해 에바리스토라는 인물의 정체성 변화를 보여준다. 스페인어를 고수하던 그는 마르틴의 설득으로 이사우로와 재회했고, 둘은 시크릴어로 대화하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고 옛날을 추억했다. 그러나 이사우로가 그에게 변치 않은 사랑을 표현하자, 스페인어의 족쇄는 그를 더욱 조여 왔고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고 말았다.


끝까지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이사우로는 폐병으로 눈을 감았으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시 한번 에바리스토와 만나길 원했다. 이사우로는 떠나면서 마르틴에게 시크릴어로 말을 남겼는데, 당연히 마르틴도 그리고 관객들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시크릴어를 아는 사람은 이제 단 한 사람뿐이니까. 마르틴에게 이 말을 전해 들은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의 영혼이 향했을 ‘시크릴의 이상향’이라 불리는 동굴로 찾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동굴 앞에 서서 이사우로를 향해 시크릴어로 진심을 전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있어 언어가 족쇄만이 아니라 그것을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영화 속 에바리스토의 손녀 루비아는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라디오로 영어를 가르친다. 물론 그 스스로도 하루빨리 마을을 떠나 미국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고 말이다. 그는 시크릴어를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는 마르틴의 질문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답했는데, 이는 비단 루비아만의 입장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시크릴어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고,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그저 영어를 배울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세계의 왕좌(王座)에는 미국이 앉았고 이제 그들은 살기 위해 스스로 영어를 선택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다르지 않다. 알파벳과 수능 문법을 받아 적으며 필사적으로 영어를 익히고 이를 점수로 치환한다. 이것이 언어의 본래 역할일까? 나의 마음을 전해, 그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이야말로 언어이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언어의 족쇄를 채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우 모두 '다른 언어'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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