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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10. 2019

캐럴 댄버스의 이야기, <캡틴 마블>

방향이 잘못된 관객과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마블의 신작, <캡틴 마블>이 지난 3월 6일 개봉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에 대한 반격의 열쇠 중 하나가 될 캡틴 마블의 이야기이기에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를 기다리고 있던 건 기대와 응원이 아니라 – 주로 브리 라슨을 향한 – 비난이었다. ‘너무 강해서 밸런스가 무너진다.’ ‘스탠 리 옹을 모욕했다.’ ‘페미니스트다.’ 이해한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제각각이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자유이며, 나는 이를 존중한다. 그러니 여기서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위의 이유들이 영화 <캡틴 마블>을 향한 비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영화다. 스크린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평하는’ 기준은 영화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영화가 완성도 있는 작품인지,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였는지, 재미는 있었는지 등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그 영화를 누가 만들었고 누가 등장하며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떠한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캡틴 마블>은 MCU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영화이다. 때문에 영화의 완성도가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색채 때문에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고, 대한민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연료로 이 논란에 불이 붙었다. 누군가 나에게 <캡틴 마블>이 페미니즘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는 있다. 이 영화에는 분명히 페미니즘적인 키워드들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영화’라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성 중심 서사의 영화들을 묶는 하나의 장르인가? 여성이 중심에 선다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의 본질이며 그것만이 페미니즘의 전부란 말인가?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페미니즘 영화’라는 표현을 – 페미니즘이 아니라 저 명칭을 – 싫어한다. 영화에 틀이 씌워지면 그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정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비판적 입장을 잃은 관객들은 영화가 아니라 ‘틀’에 따라 맹목적으로 영화를 찬양하거나 비난하게 되고, 지금 <캡틴 마블>이 이러한 상황이다. 내가 페미니즘 영화라는 표현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은, 이 표현이 누군가에게 영화에 대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금까지의 히어로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데도 말이다. PC가 지나치진 않을까 우려되는 마음에 선뜻 예매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다른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는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캡틴 마블>은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마블의 영화이며, <엔드게임>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택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독립 영화였다면, 마블이 아닌 개별적인 영화였다면, 그때에도 영화가 외면받지 않았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캡틴 마블>은 여성의 이야기도, 남성의 이야기도 아니다. 인간 캐럴 댄버스의 이야기다. 캐럴은 여성이고, 당연히 여성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자 취급을 받고 직업적으로 차별받던 80~90년대 미국에서 그는 당당히 파일럿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다가오는 위기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누구든지 그처럼 히어로가 될 수 있다. ‘HER’가 ‘A HERO’로 변하는 예고편의 문구는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캡틴 마블>이 페미니즘 영화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경계를 나누고 싶지 않다. 무엇은 페미니즘이고, 무엇은 아니고. 대체 페미니즘의 목적이 무엇일까.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고 이번에는 결론만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여성의 인권 신장을 통한 만민의 평등이다. -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나의’ 페미니즘이다.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나와 다른 목표를 지녔을 수도 있다 - 페미니즘 영화라는 명칭은 페미니즘, 나아가 여성을 남성과 구분되는 하나의 장르로 분리시키며, 사회에 만연한 급진적인 오해들을 가속화시킨다. 때문에 나는 <캡틴 마블>을 여성의 이야기보다 포기하지 않은 인간 캐럴 댄버스의 이야기라 부르고 싶다.


*이 앞에는 <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적인 얘기가 길어졌다만, 본론으로 들어가서 영화 내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율이 없었다. <캡틴 마블>은 ‘캡틴 마블’의 이야기여야 하는데 정작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이들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고르라면 – 귀여운 구스를 제외하고 – 당연 탈로스다. 그가 빌런이 아닐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개봉 전부터 퍼져있었기에 반전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스크럴 종족이 난민 이슈를 상징하고 있었다는 점과 갑작스러운 신파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PC색채가 짙지 않았던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였던 것은 스크럴 종족이 처해 있는 난민과 같은 삶이었다. 이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그의 가족이 등장하고 아이들이 나오면서 훅 신파가 몰려오고, 스포트라이트는 캡틴 마블에게서 탈로스로 넘어갔다. 캐럴이 각성하고 적들과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불쌍한 스크럴 종족이 무사히 집을 찾을 수 있을지에 내 모든 감정이 실려 버린 것이다.


메인 캐릭터의 이동에는 신파의 영향도 있지만 더 큰 원인으로는 캡틴 마블의 액션에 전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하다. 매우 강하다.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수십 명과 싸워 이길 정도로 강하다. 물론 그가 강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타노스라는 초월적 강자가 등장한 상황에서, 그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인물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 힘의 사용이 단조롭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액션 자체는 쉬지 않는다. 레이저도 쏘고 충격파도 쏘고 때리고 차고 날아다닌다. 하지만 계속 움직일 뿐 캡틴 마블의 액션은 일방통행이었다. 그의 공격을 적은 받아낼 수 없다. 맞으면 멀리 날아가버리니까. 서로의 공격이 교차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액션이 계속 끊기기를 반복했다. 종종 적들이 공격을 하더라도 잠시 받아주다가 포톤 블래스트로 한 방에 날려버리니 특별히 위기라 부를 이벤트도 없었던 것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오프닝 전투

물론 캐릭터가 모든 상대를 원펀치로 끝낸다고 해서 액션이 무조건 단조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토르: 라그나로크>의 오프닝 전투에서는 묠니르를 따라 카메라 시점을 이동시켜, 스크린에 역동성을 부여했으며, 만화 <원펀맨>은 주인공 히어로의 등장을 늦추고 빌런에게 집중하며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영화 <캡틴 마블>은 히어로의 주 무기인 포톤 블래스트에 포커스를 맞췄는지 레이저가 길게 뻗어 가는 모습과 그로 인해 날아가는 적을 가로로 긴 화면에 담았는데, 화면이 길어지고 캐릭터는 움직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역동성은 떨어졌다. 적에게 집중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는 탈로스를 비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작 캡틴 마블과 싸우는 크리 스타포스의 멤버들은 제대로 설명조차 되지 않은 채 소비되었다.


너무 악평만 한 것 같지만, 영화 자체는 무난했다. <블랙 팬서>의 충격 흡수 및 방출 기능이 너무 만능으로 묘사되어 아쉬웠듯이, 캡틴 마블의 힘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의 영화에서는 관객들도 영화도 주목의 방향을 헷갈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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