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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27. 2019

'촌'스러운 좀비 영화, <기묘한 가족>

무한한 좀비의 가능성

좀비


좀비가 부두교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약물을 통해 가사상태에 빠진 뒤 깨어나면 노예로 부려지는 존재, 그것이 좀비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람을 잡아먹는 되살아난 시체’의 이미지와는 꽤나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이 식인을 하고 호러 장르의 터줏대감이 된 것은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이다. 좀비가 주는 충격과 장르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맞물려 좀비 호러 영화는 계속해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꾸준히 제작 중에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공포의 존재, 지금부터 이를 ‘1세대 좀비’라고 하자.


새벽의 저주 (2004)

좀비의 수요는 상당했고 마니아층 역시 두터웠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소재, 좋은 스토리도 오랜 기간 반복되면 클리셰가 되어 예측이 쉬워지고 재미는 반감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생각을 바꿨다. 클리셰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주인공 같았던 인물은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고, 어딘가 어리숙한 인물이 좀비와 싸우게 됐다. 이러한 클리셰 파괴는 대중에게 당혹감을 주었고, 감독들은 이를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이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2세대 좀비’는 희화화의 대상이다. 1세대 좀비 영화들이 좀비의 그로테스크함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사투에 집중했다면, 2세대는 좀비를 희화화하여 좀비 자체의 위협을 줄이고, 좀비 사태 속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행동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의 중심이 좀비에서 인간으로 옮겨간 것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2004)

다소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그럼 이번 글의 메인인 <기묘한 가족>은 어디에 속할까. 좀비 영화에 세대 구분을 한 것부터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었지만 한 번 더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기묘한 가족>은 3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을 계승하며 질적 차원의 성장을 이룰 수도 있고, 계승하되 세대가 구분될 정도로 변주를 할 수도 있다. 2세대가 1세대를 기반으로 비틀어졌듯이, 3세대는 2세대로부터 파생되었다. 2세대처럼 사태 속 인물들에 집중하며 적절히 코미디가 가미되어 있지만 좀비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둘은 차이를 보인다. 2세대 좀비가 1세대처럼 단순히 인간을 공격하는 존재였다면, 3세대의 좀비들은 보다 '특별한 목적'이 부여되어 있다. 작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상영작이었던 <좀비공장>은 좀비를 식품으로 활용했으며, 로봇처럼 좀비가 미래의 노동력을 대체한다는 설정의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띄고 있다. 3세대의 요지, 특별한 목적이란 바로 ‘비즈니스’다.


지금까지 이런 좀비는 없었다
이것은 좀비인가 비아그라인가


<기묘한 가족>의 좀비, ‘쫑비’는 특별하다. 좀비에게 물리면 생명을 잃는 게 보통이지만, 쫑비는 오히려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피부가 좋아지고 근력이 늘어나며 매우 정력적인 사람이 된다는 매혹적인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영화는 이 부작용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이 되는지 굉장히 직설적이며 재치 있게 보여주는데, 이를 위해 관객과 마을 어르신 모두의 시선을 좁디좁은 화장실로 향하게 했다. 모두의 눈과 귀가 집중된 소변기에는 무지개가 걸려있었고, 주변에선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쫑비가 물어다준 것은 단순한 회춘의 약이 아니라 비아그라였던 것이다. 이후 마을의 어르신들뿐 아니라 모든 남성들이 의문의 처방을 받기 위해 앞 다투어 만덕 일가로 모여들었고, 이들 가족에 의한 회춘 비즈니스가 시작됐다.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입니다

특정한 가치를 지닌 상품 혹은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라볼 때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리라. 상품을 원하는 자가 있고 그 상품을 판매하는 자가 존재할 때, 자연스레 시장은 형성되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 속 회춘 비즈니스는 큰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 쫑비를 매개로 한 회춘 시장은 윤리가 결여된 채 욕망만으로 돌아가는 시장이라는 점이다. 쫑비의 기원은 기업 ‘휴먼인바이오’의 불법 임상 실험이었으며, 그를 이용한 남주와 민걸은 돈을 버는 것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쫑비에게서 상품가치를 찾자마자 ‘좀비’의 위험성을 망각했으며, 쫑비와 고객 사이에 벽을 세워 고객이 정보에 접근치 못하도록 했다. 물론 소비자들은 정보에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특효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무엇보다 대체 팔뚝에 이빨 자국은 왜 생기는 것인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나도 신랑 노릇 해야 하지 않겠냐!”, “둘째 좀 보자!”라고 외치며 눈을 감고 팔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춘이라는 부작용은 어디까지나 부작용일 뿐, 좀비에게 물리면 나타나는 본래 효과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력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의문조차 갖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욕망만이 남은 존재로 추락했다. 영화의 중반 결혼식 장면, 버진로드를 중심으로 좀비가 된 신랑 측과 공포에 휩싸인 신부 측으로 나뉜 구조는 예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는 ‘정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보였다.



<기묘한 가족>은 제목처럼 영화도 기묘하다. 마치 여러 맛집의 재료들을 섞어서 짬뽕 한 그릇을 만든 것처럼, 어디서 본 듯한 설정과 장면들이 섞여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자칫 어지럽기만 하고 실속 없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영화는 예상을 깨고 의외로 맛있다. 분명 다 아는 전개지만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던 <기묘한 가족>만의 ‘촌’스러움이라는 조미료가 이 영화의 신선함을 어필한다. SUV 대신에 레커차를 타고, 전기톱 대신에 예초기를 들었다. 대도시를 무대로 하지 않고 시골 마을을 택했으며, 인물들의 사투리는 표준어와는 다른 부드러움을 느끼게 했다. 거대 기업의 실험이라는 좋은 소재가 있음에도 주연들 중 누구도 이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 사람들의 정력에 대한 숭배를 풍자하는 것으로 영화는 더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다. <부산행>과 <창궐> 이후 대한민국 시골의 익숙함을 살린 ‘촌’스러움으로 앞선 작품들과는 다른 ‘한국형 좀비 영화’의 다양화를 꾀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P.S. 윤종신 씨의 <환생>이 잊을만 하면 흘러나오는데 정말 영화에 딱 맞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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