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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25. 2019

내가 사는 이유, <글래스>

우리 모두의 기원(origin)이 될 이야기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그릴까. 히어로 스토리의 전개는 굉장히 단순하다. 주인공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히어로로 각성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커다란 틀 안에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럼 사건을 모두 해결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어벤져스의 멤버들은 ‘뉴욕 전투(영화 <어벤져스>)’ 이후 무얼 하며 지내고 있는가. 변주와 반복이다. 빌런과 싸워 승리하면 다음 빌런이 나온다. 지금도 수많은 빌런들이 스크린 속에서 히어로와 만날 날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마블을 좋아한다. DC도... 캐릭터들은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는 그들만의 영화다. <아이언맨>은 아이언맨의 영화고, <맨 오브 스틸>은 슈퍼맨의 영화다. 스크린 앞에 앉은 나는 토니 스타크도 클락 켄트도 아니다. 영화 속 복선을 찾고, 캐릭터들을 분석하며, 다음 영화를 기다려도 나는 그들이 될 수 없다. 내게 슈퍼파워 같은 건 없으니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글래스>는 히어로 영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를 거치며 쌓아왔던 히어로와 빌런의 이야기는 모두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불씨는 이제 누구에게 이어졌을까. 새로운 히어로? 새로운 빌런? 물론 영화의 후속이 나온다면 필요에 의해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스터 글래스의 의지는 마치 깨진 유리처럼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스크린 바깥으로까지 날아와 박혔다.



엘리야(미스터 글래스)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했다. 유리처럼 약한 그의 몸은 타인과 비교하여 실패작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불량품이 아니라, 누군가 강철 같은 신체를 지닌 자의 대척점에 서있는 존재라 믿었고, 결국 그는 데이빗을 발견했다. 데이빗은 그 존재 자체로 엘리야가 태어난 이유가 되었다. 비상하게 강한 누군가가 태어났으니 약한 누군가로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이유에는 ‘왜 태어났는가’ 외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다. ‘왜 살아가는가’. 우리에게 있어 목표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즉 자아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출생에 관해서 우리 스스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아를 지님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그 이후의 삶에 있어 능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 그의 목표는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고, 그는 이를 달성했다.


영화 속에서 엘리 박사와 그가 속한 조직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자아에 따르려는 자들을 회유하고 제거하며 사회를 관리한다. 물론 사회가 보다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유지되기 위해서 구성원의 평준화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일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로드맵이 존재하고, 이를 따라 꿈보다는 경제적 안정성을 좇게 된다.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믿은 채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다시 존재 이유 이야기를 해 보자.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정신 차려보니 태어나있었고, 태어났으니 살고 있다. 히어로도 빌런도 없이 76억 명의 엑스트라들만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사회가 작동하기 위한 톱니바퀴에 불과한 걸까. 기계에 끼워져 날이 부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인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야처럼 운명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모두 수많은 엑스트라들 중 하나인 동시에,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하고 싶을 뿐이다.


이 세상은 엑스트라뿐이기에 히어로의 자리가 비어있다. 여유가 없어서, 사는 게 바빠서 우리는 ‘진짜 나’와 마주하지 않고 엑스트라인 채로 세상에 맞춰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언브레이커블>의 데이빗처럼 말이다. 그때 TV에서, 책에서 혹은 영화에서 꿈을 좇는 사람,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유리조각이다. 영화 속에서 미스터 글래스는 기차 사고를 일으켜 케빈의 23가지 인격이 눈을 뜨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들 패거리는 케빈을 학대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이들은 다시 <23 아이덴티티>에서 만난 소녀 케이시에게 영향을 주었다. 케이시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하던 삼촌을 법 앞에 세우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히어로에게는 초인적인 힘도, 마법이나 첨단기술도 필요 없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흔해빠진 캐치프레이즈 하나면 충분하다.


이제 히어로의 범위는 초인에서 대중으로 넓혀졌다. <글래스>는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지켜본 우리 모두의 기원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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