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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Oct 05. 2019

질서를 불러올 혼돈, <조커>

선과 악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따르다

영웅이자 빌런이었고, 빌런이자 영웅이었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등은 이야기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의 갈등은 주인공을 고뇌하고 성장케 함으로써,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희열과 교훈을 남긴다. 당연하지만 그 갈등이 깊을수록, 다시 말해 주인공이 적을 쉽게 이겨내지 못할수록 이를 극복했을 때의 성취감은 배가된다. 그러니 대립자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전까지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갈등의 양상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었다. 선한 주인공이 악의 화신을 무찌르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그것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매우 편의적으로 작용하는데, 적이 벌이는 행동의 이유도, 적을 쓰러트려야 하는 이유도 모두 그저 그가 악하기 때문으로 귀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은 정말로 악할까?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세상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선과 악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에, 누군가를 구하고자 했던 선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때문에 대립하는 주체들에게 선인이나 악인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갈등을 평면적으로 만들고 실체를 흐릿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분법적 진영 논리가 아니라 흑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각자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선하다면 왜 선한지, 악하다면 어째서 악한 것인지 그들 모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명히 조커는 빌런이다.


DC코믹스의 페이지 속에서부터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의 모습들까지, 이제까지 우리가 봐온 '조커'는 그야말로 '범죄계의 광태자(Clown Prince of Crime)'라는 이명이 발산하는 이미지 그대로의 캐릭터였다. 광대 분장을 한 사이코패스이자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 때로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또 때로는 철학적인 난제를 던지며 범죄를 저지르는 그의 이름은, 최고의 빌런을 논하는 자리에 결코 빠지는 일이 없었다. 조커 특유의 기괴한 마스크와 광기 어린 웃음은 섬뜩함을 넘어 카리스마를 풍기기에, 작품 내외로 그에게 수많은 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범죄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범죄자다.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조커와 사뭇 달랐다. 광대 분장을 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강도를 당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도 결코 그 분노를 타인에게 향하지 않았으며, 소아병동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춤을 추고 집에서는 아픈 어머니를 보살폈다. 자신에게 웃음 발작을 일으키는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주머니에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메시지 카드를 지니고 다니는, 그저 지나치게 선량한 약자였다.



그러나 아서가 총을 손에 쥐게 된 이후로, 그는 서서히 우리가 아는 그 조커로 변해갔다. 더 이상 분노를 참지도,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들을 향해서는 자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슬픔과 고통, 과거의 선량함을 지켜봐 온 관객들은 그를 동정할 것이고, 세상의 잔혹함을 아는 관객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지하철에서 여성을 희롱하고 아서를 구타한 취객들에게 총을 꺼내 발포한 순간, 통쾌함에 환한 미소를 지었고, 집에 찾아온 랜들을 무참히 살해할 때, 마음속 묵직한 응어리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 호응할 수 없다. 그는 범죄를 저질렀다. 범죄자가 된 것이다. 원인과 의의를 막론하고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 아서의 각성이 기뻤다. 조커가 되어 당당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모습에 진심으로 다행이라 느꼈다.

단지 그 각성의 수단이 총이 아니었다면,

그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살육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가 빌런이 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안타까움까지도 함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조커는 영웅이다.


조커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 '광기'나 '혼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 <조커>의 조커에게 그러한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 그에게서 비인간적인 광기가 새어 나올 때에도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가 혼돈의 모습을 했을지언정 그에게는 너무나도 명확한 신념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그가 죽인 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지하철의 취객들은 권위 의식에 도취해 있었으며, 랜들은 거짓을 일삼는 위선자였고, 어머니 페니 플렉은 가정 폭력의 방관자였다. 영화의 후반부 조커는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에게 총을 겨누며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라고 외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비웃으며 상류층을 대변할 뿐인 머레이에게 과연 삶을 누릴 가치가 있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


혼돈처럼 보이는 그에게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머레이와 TV쇼의 관중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조커를 비난했지만, 그런 그들에게 조커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머레이의 말처럼 당연히 세상에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조커도 세상의 모두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는 랜들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리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직 그만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조커의 심판은 무분별한 살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타깃은 배려와 예의를 모른 채 남을 짓밟으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가 겪어온 수많은 고통과 부조리들은 우리의 삶과 무수히 많은 공통분모를 형성하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조커에게 설득될 것이다. 그는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고,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비웃음과 혐오만을 보냈었다. 추악한 세상에 반기를 든 자가 영웅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영웅이란 말인가.



결국 조커는 조커였다.


영화의 무대인 고담 시에서는 상류층과 하류층이 분리되어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조차 고난인 서민들은 상류층을 비난하며 파업과 시위를 시작했고, 상류층은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본인들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경찰의 총에 맞은 시위대는 묻히고 시위대에게 폭행당한 경찰만이 뉴스에 오르는 등 미디어는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했고, 반대로 시위대는 이름 모를 범죄자 광대를 우상으로 삼으며 수위를 높여갔다. 어느 쪽도 선이나 악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각자가 스스로에게는 선이며 상대방에게는 악인 상대적 존재들이었다.


상류층도 하류층도, 서로를 향한 비난과 혐오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이기적인 모습은 되돌아보지 못했다. 청소부의 파업으로 거리는 쓰레기장으로 변해갔고 도시는 전염병이 창궐할 위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파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문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도시의 문제는 자신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해결할 문제였던 것이다. 토마스 웨인 또한 이러한 상황마저 자신의 시장 선거로 연결하여 이용할 뿐, 이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은 무엇 하나 내놓지 않았다. 그 역시 중요한 것은 그의 커리어, 그의 가족, 그의 회사뿐이지 도시가 직면한 문제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타협도 충돌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며 상황을 악화시켜만 가던 이들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건 바로 조커였다.



조커의 살인이 생중계되고 그의 신념이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자, 시위대는 폭도로 변하여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점점 격해지긴 했지만 결코 선을 넘지는 않았던 고담의 시민들이 조커를 기폭제로 터져 나온 것이다. 조커를 체포하여 호송하던 경찰은 사회를 뒤덮은 혼돈을 바라보며 조커를 힐난했지만, 정말 그것은 단순한 혼돈이고 비극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이제 상류층과 하류층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상류층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반격을 가할 것이고, 마치 어느 한쪽이 완전히 연소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불길은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혼돈은 오래갈 수 없다. 당장은 쌓여왔던 분노가 터지며 타오르고, 그 후 얼마 동안은 서로를 향한 혐오로 불꽃의 위세가 커지겠지만, 머지않아 혼돈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 것이다. 피폐해진 사람들은 질서를 찾게 되고, 그렇게 사회에는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미래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커가 시위대의 영웅이 된 바로 그 날,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또 한 명의 영웅이 태어나는 것을 우리는 함께 지켜보았다. 조커가 불러온 혼돈은 그의 적, 소년 브루스 웨인을 시련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시련을 극복하고 배트맨으로 각성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혼돈은 자신을 끝낼 질서의 출연을 분명하게 예고했다.



물론 추악한 세상을 불태우는 것도 그 자리에 질서의 씨앗을 심는 것도, 그 무엇 하나 조커는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그는 언제나 우발적이었다. 대립하는 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홀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만 행동했다. 이 점이 이번 조커의 가장 큰 특징이리라.


지금까지의 조커는 언제나 '배트맨의 적'이었다. 질서의 수호자에 맞서 혼돈을 상징하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으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는 빌런인 동시에 영웅이었으며, 혼돈을 이끌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았다. 선을 잉태한 악과 악에서 태어날 선, 과연 이들을 단순한 선과 악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를 쉽사리 영웅이라고도 그렇다고 빌런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공존하는 그는 그저 한 명의 광대였다. 조명 아래에서 세상을 향해 풍자와 조크를 던지는 익살꾼(Joker)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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