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Oct 10. 2019

당신은 고담에 살고 싶으신가요?

미디어가 초래한 '조커'라는 부작용

*영화 <조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꼴에 미디어를 배우고 있다고,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면 그 속의 뉴스나 방송에 시선이 갔다.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를 첫 관람하면서는 배우의 연기에 압도되고 스토리에 빠져들었었기에, 단순히 언론이 철저하게 상류층, 보다 정확히는 토마스 웨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정도만을 느꼈었다.

며칠이 지난 뒤 영화를 재차 관람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스토리를 알고 있었기에 보다 영화의 연출적인 부분과 아서 플렉을 둘러싼 주변의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신문이나 뉴스, 머레이 쇼와 같은 TV 프로그램까지. 고담시의 여러 미디어들을 바라보며 돌연 미디어가 폭동을 만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화 속 시위대의 발족부터 폭동으로의 격화까지, 그 기폭제는 모두 조커로 묘사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고담시의 빈부격차는 극심했고, 부유층을 향한 빈곤층의 분노도 적지 않았다. 도시가 쓰레기장이 될 정도로 미화원들의 파업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일반적 수준을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던 와중에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광대에 의해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시위대를 조직하여 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 왜 조커를 영웅으로 추앙했을까? 어떻게 범죄자가 영웅으로 받아들여진 것일까?


사실 아서는 세 명의 남자가 누구인지, 직장은 어디고 형편은 어떠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그는 애초에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을 향한 고통과 관심에만 반응했기 때문에 자신 외의 타인에 대한 것은 관심사 밖의 일이었으리라. 영화 속에서 그가 벌인 범죄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였지, 그 어떤 정치적 혹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았다. 아마 이 사건이 아서의 관점에서 보도되었다면 대중은 그를 동정하고 이해할지언정 결코 숭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본 우리가 여전히 그를 빌런으로 보는 것처럼.



하지만 영화 속 언론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대변하는 상류층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피해자들이 평범한 웨인 사(社)의 직원들이었음을 내세우고 토마스 웨인의 인터뷰를 전파함으로써, 사건에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취객들은 선량한 피해자가 되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 아서는 계급 갈등 속 반사회주의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편파적 보도가 대중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예로부터 적의 적은 동지인 법, 상류층의 적이 된 광대를 사람들이 혁명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멋대로 아서의 살인을 미화한 것이다. 미디어가 살인자에게 선동가의 옷을 입혔고, 자연스레 그는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조커의 살인은 고담시 전역으로 생중계되었다. 그가 지하철에서의 범행사실을 밝힐 때에도, 머레이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선 조커가 TV쇼의 마무리 멘트를 읊자 비로소 방송 송출이 중단되었다. 본래 무대에 올라온 조커의 걷잡을 수 없는 언행에 스태프는 촬영을 중단하려 했었지만, 머레이는 계속해서 토크를 이어갔다. 그는 조커라는 자극적인 화제를 시청률 등에 이용할 심산이었으리라.


머레이 쇼를 방영하던 채널이 끊기자 영화는 곧바로 다른 채널들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고담시에 송출되는 수많은 채널이 생방송 중 일어난 총격사건을 속보로 다루기 시작했고, 조커의 연설과 발포 장면이 반복 재생되었다. 이와 같이 속보에서 사실을 재빠르게 전달하는 것은 분명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선정적인 고담시의 방송은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언론은 시청자 혹은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다양한 집단들을 견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언론은 정보 전달 수단으로 주로 매스미디어를 이용하는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매스미디어의 특성상 언론이 다루는 정보는 높은 파급력을 지니게 된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며 정보의 공유와 재생산 속도는 더욱 빨라졌으며 이러한 미디어의 발달은 커뮤니케이션에 혁명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언론의 상업성과 정치적 편파성을 심화시켜 소위 '언론권력'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언론은 스스로 혹은 타자와 연계하여 권력화 되기 쉽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윤리강령'을 세워 언론의 공익성을 수호하고 있다.


신문윤리실천요강


한국의 경우 신문사나 방송사 등의 보도기관이 자율적으로 강령을 채택하며 윤리위원회를 설립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신문윤리강령'이 있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 개인의 사생활 보호 등 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신문윤리실천요강'이 마련되었고, 그중 제3조 보도준칙의 네 번째 항목은 바로 '선정보도의 금지'다. 위의 이미지에 적혀있듯이, 언론은 성범죄나 살인사건 등 비윤리적 사건을 보도할 때 그것을 선정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저속한 표현은 언론의 품위를 떨어뜨리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과도한 사건 묘사는 일부 대중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모방범죄의 가능성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조커> 속 고담시의 언론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대규모 시위가 한창일 때 조커의 범행을 대중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는 데에 일조했다. 조커의 -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 선동적인 발언을 전파에 실었고, 무엇보다 그가 총을 쏴 머레이를 살해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일체의 여과 따위 거치지 않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화면이었다. 실제로 언론에게 폭동을 일으킬 목적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보도행태가 올바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뉴스를 본 시위대가 횃불을 손에 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디어는 현실의 일부를 선택, 강조하여 왜곡한다.


선정보도는 당연히 언론에게 득이 된다. 보도가 팩트인지 아닌지, 공익적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기사는 일단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론은 대중의 감정에 따라 흘러가기 쉽기 때문에 우리의 코드와 맞는 언론은 사랑받고 부흥하며, 반대되는 곳은 외면받게 된다. 먼 나라 이야기도 영화 속 이야기도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 시기의 JTBC가 그러했고, 현재의 여러 유튜브 채널들이 그러하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이 존재해왔지만, 아마 지금 가장 깊게 사람들이 양분되어 있지 않을까? 물론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진영이 의견을 나누며 견제해나가는 것은 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올바르고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테니까. 하지만 현재의 사회는 <조커> 속 고담시처럼, 서로를 향한 분노와 혐오가 너무 앞서고 있는 건 아닐까. 진영 논리에 집어삼켜져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더욱더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한 번쯤 이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진=뉴시스


애석하게도 미디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한겨레'와 '조선일보'만 봐도 과연 이 둘이 같은 세상을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언론사는 색깔대로 진영 따라 사건을 보도하고, 우리는 점점 보면서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 것만, 나랑 생각이 일치하는 기사만 찾아본다.


세상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게임이 아니다. 지극히 상투적이고 이상론적인 말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해야만 한다. 몇 명이 모였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게 수가 중요하다면 분명 1인 시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우리가 광장에 모이고 거리로 나선 것은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지,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 우리는 이를 망각하게 되는 걸까? 이성을 잃게 만드는 분노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미디어는 자신들이 초래한 부작용마저도 새로운 기삿거리로 장식할 것이다. 그러니 이 연쇄를 끊으려면 미디어를 소비하는 대중이 바뀌어야만 한다. 이 또한 상투적이지만, 지금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이 문장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것이다.




나는 고담에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말,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누군가가 조커가 되어야만 혼돈이 끝나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질서를 불러올 혼돈, <조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