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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Oct 28. 2019

서로의 한 발자국이 만드는 변화, <82년생 김지영>

편을 나누는 대신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세상을 바꿀, 서툴지만 함께 내디딘 발걸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서로 이해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어온 말이지만, 과연 우리는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예전의 나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타인을 이해한다니, 그보다 오만한 말이 있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의 나도 그리고 나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향해 '이해한다'는 말을 던졌다. 부드럽게 건넨 "네 생각은 이해해-"라는 말 다음에는 십중팔구 "하지만 내 생각은-"이 따라왔지만 말이다.

결국은 자기 생각이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해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한 사전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예쁜 겉치레에 불과했다. 상대방을 유화시키며 마치 자신은 지성인이자 대인배인 양 포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였는가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단 하나의 거짓과 꾸밈없이,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상대방을 이해했다. 그 사람의 말에 공감했고, 내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은 없었다. 눈을 돌리고 귀를 막으면 계속해서 내 생각이 정답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건 어째서였을까?


그때의 그 사람과, 이전까지 만났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아니,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그의 차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자기 자신의 틀 밖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빈자리에 다른 이를 들일 여유가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면서도 결코 아집에 빠지거나 상대의 말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와는 다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나는 이것이 절대 올바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기심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기적이기만 해서는 결코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내가 보는 세상이고, 내 귀에 들리는 건 내가 듣는 세상뿐이기에,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내 세상밖에 알 수가 없다. 내 생각만이 당연하고 옳다는 자만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물 안에서 왕 노릇을 하는 개구리의 꼴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 속에서 어떤 아픔과 즐거움들을 마주해왔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지금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알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다시 이를 위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했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가 쉽게 감정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름'이라는 말처럼, 다짐을 한 순간 이미 내가 보는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모두가 나처럼 이기적이고 자신들의 생각 속에서만 옳을 뿐이라고 치부해왔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보지 않았을 뿐 내 주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 아직 확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나 혼자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금씩이나마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고 있다. 아직은 이걸 '이해한다'라고 볼 수는 없으리라. 그렇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멀어진다면 언젠가 나와 상대 모두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절충점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쯤 되니 이제 내가 에세이를 쓰는 건지 영화 리뷰를 쓰는 건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영화의 제목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니.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적으로도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지만, 그걸 다 적으면 스크롤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미 훌륭한 글들도 나와있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신 많이 힘들었겠네...
네가, 나랑 결혼해서 아픈 걸까 봐...


위 대사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지영(정유미)'과 '대현(공유)'이 식탁에 마주 앉아 나눈 말이다. 때때로 일어나는 지영의 빙의 현상에 대해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채 숨겨왔던 대현은 마침내 스마트폰 영상을 지영에게 보여주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상담사를 찾아가도 봤지만 육아 우울증 외에는 빙의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대현은 지영을 설득하기 위해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크게 놀랐다. 누군가 내게 '내가 모르는 나의 기행이 찍힌 영상'을 보여준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하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어쩌면, 아니 분명 나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지 않았을까. 애초에 이런 걸 왜 찍었냐고, 나에게 정신병이라도 씌우고 싶었냐고, 그리고 대체 왜 말을 안 했냐고...


하지만 김지영은 달랐다. 분명 믿기 어렵고 충격적이었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려고 했다. 왜 미리 얘기하지 못했을지, 왜 내게 병원에 가보라고 했을지, 대현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헤아렸고, 그 결과 그에게 질타 대신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만 갇힌 채 상대의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대현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시작부터 대현은 계속해서 지영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지영의 몸과 컨디션을 신경 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자 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러한 사람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순간 이래로 그는 지영의 아픔과 마주했고, 이해했으며, 이제는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 영화 속 대현에 대해 '너무 비현실적으로 착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는 언제나 현실성을 잃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한 대현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서투른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인 한 발자국은 그를 우물 밖으로 나오게 했고, 그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대현을 판타지적 인물로 느껴지게 한 것이다.


지영과 대현, 두 사람은 서로를 위했다. 상대방의 아픔에 마주한 순간, 나와는 다르다며 편을 가르거나 무시하지 않고, 서로 상대의 아픔을 나누어 덜어주고자 했다. 내게는 그 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SNS 속 혹자들의 말처럼 원인과 결과를 따진다면 분명 누군가에게는 잘못이 있으리라. 그렇게 절대적인 비난을 받는 걸 보면, 그들이 '한남'이라 부르고 '한녀'라고 부르는 두 사람은 분명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들이겠지. 그렇게 남을 비난하면서까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일까.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일까, 아니면 그저 갈등이 확대되기를 바라는 걸까. 분명한 건 그들은 양 쪽 모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점이다. 진영에 따라 둘로 나뉜 것도 결국,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발언에 힘을 더하고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에 불과하다.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색깔 놀이에 한창인 정당들도, 그 속에 묻혀 혐오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도 모두 그들과 다르지 않다.


부디 그들 모두가 이 영화에 대해 그들만의 프레임을 씌우지 말고 지영과 대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란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국민이 둘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혐오 사회로 말이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새로운 조커가 태어나고 수많은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세상인 걸까.


서로가 한 발자국씩만 물러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분명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변할 텐데.

김지영도, 모두도, 더 이상 아파하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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