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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Nov 12. 2019

비극의 재해석,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연민의 시선을 거두고 그들의 입장에서 사랑을 그리다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음을.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신화들 중, 현대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것은 아마 '그리스 로마 신화'이지 않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는 후대의 문학과 예술의 모티브가 되었고, 그들의 이름은 과학 용어부터 상품의 브랜드명까지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었다. 고대 그리스 음유시인들의 노래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책으로 편찬되었고, 이후 국경을 초월하여 연극과 뮤지컬,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로 재생산되었다.


전쟁과 시련 중심의 영웅 신화들 사이에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비극적인 사랑으로 유명하다.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살리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저승으로 찾아갔다. 그의 아름다운 리라 연주에 감동하여 하데스는 그가 아내를 데려가도록 허락했지만, 대신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지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고개를 돌렸고, 결국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삶과 죽음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오르페우스는 다시 한번 하데스를 찾아가 간청해보려 했지만 더 이상 저승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는 실의에 빠진 채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와 그림의 모델이자 곧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화가와 모델의 관계가 아니었는데, 엘로이즈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미 수차례 초상화 제작을 거부해왔었다. 때문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직업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함께 산책을 하며 그를 관찰하고 그 기억에 의존하여 초상화를 그려내야만 했다.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초상화는 빠르게 완성되었다. 본래 마리안느는 그림이 완성되면 이를 의뢰인인 백작 부인께 보여드리고 저택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대화와 관찰을 계속하며 엘로이즈에 대한 마리안느의 감정이 커져갔고, 결국 그를 속일 수 없다며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완성된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엘로이즈가 직접 모델이 되겠다며 마음을 바꿨고, 때문에 마리안느도 그림을 새로 그리게 되어 며칠 더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영화도, 두 사람의 관계도 깊어지기 시작한다.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이제 어느 한쪽이 상대를 관찰하는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가 마주 보는 수평적 관계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작중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그리고 저택의 메이드인 '소피(루아나 바이라미)'가 함께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읽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있다. 소피는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비난했지만,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보았을 것이라 말했고, 엘로이즈는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돌아보라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는 실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해석이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그들의 입장에서 - 에우리디케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 사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단순히 비극적인 사랑이라 여겼을 뿐, 그 이상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로 비극인 걸까?

오르페우스는 단지 성급하고 어리석었던 걸까?

명계로 돌아간 에우리디케는 과연 오르페우스를 원망했을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으며, 죽은 자는 산 자의 곁에 머무를 수 없다. 그것이 금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두 사람은 함께 이승으로 올라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일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데스는 에우리디케의 영혼을 풀어주었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신화의 교훈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 두 사람은 이를 몰랐을까? 아니, 아마 그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사랑이 금기라는 것을 알았기에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오르페우스 또한 부름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우스가 저승을 빠져나가 이승에 도착하면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어진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 건 아니었을까.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 또한 금기였다.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당시 사회에서는 더욱 거셌으며 당연시되었다. 여성은 반드시 남성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정도의 진리로 여겨지던 사회였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초상화 작업이 끝난 마리안느는 저택을 떠날 것이고, 머지않아 엘로이즈는 베니스의 남성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둘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후회하거나 이별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그 대신 함께한 순간들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 인사 후 급히 저택을 뛰어나가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뒤 돌아봐!"라고 외쳤다. 그 목소리에 마리안느는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문이 닫히며 엘로이즈는 어둠 속에 잠겼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퀴어 영화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금기에 도전하는 영화는 아니다. 제3자의 시선으로 결과만을 보았을 때, 마리안느는 여전히 여류화가라는 제약을 받으며 활동해야 했으며, 엘로이즈는 결혼하여 집을 떠나 베니스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정말 무엇 하나 해피엔딩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 뿐이다. 하지만 엔딩에서 보인 두 사람의 표정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후회 대신 기억하기를 선택했기에, 각자의 삶 속에서 우연히 상대를 떠올렸을 때, 행복했던 시간들까지도 함께 추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들이 나눈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영화는 두 소수자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이 후회하고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이야기했다. 사랑을 제한하는 사회 속에서 단지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연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으며, 축적해온 감정들을 엔딩에서 터트리며 관객들이 두 사람과 동화를 이루게끔 했다. 우리도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도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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