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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23. 2019

독이 되어버린 보험, <백두산>

<엑시트>와 무엇이 같았고 무엇이 달랐나

<엑시트>를 바라보며 시작했으나, 결국 운전대는 <해운대>로 향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며 극장의 성수기라 불리는 12월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연말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극장이 한산해질 틈이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제작사들은 이때에 맞춰 아껴두었던 비장의 대작들을 선보이게 된다. 그중 하나인 <백두산>은, 연례행사와 같던 지금까지의 12월 재난 영화들과 다르게, 개봉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다. 하정우와 이병헌만으로도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에 더해 마동석, 전혜진, 배수지, 그리고 전도연 배우가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소식까지. 정말 캐스팅만 갖고도 이미 천만에 가까운 티켓파워를 확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개봉 후 반응은 엇갈렸고, 포털 사이트와 별점 어플의 평가는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다. 거부하기 힘든 배우진에, 새롭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운 '백두산 폭발'이라는 소재, 영화 외적으로는 CJ 제작 및 배급이라는 파워까지 갖춘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연이은 혹평을 받고 있는 걸까. 전형적인 한국형 재난 영화. 현재 SNS나 댓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한 줄 평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영화를 봐 온 사람들이라면 인물 소개만 보고도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바로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영화는 전형적이었다. 재난 영화의 공식에 충실하며 신파까지 잊지 않았으니 저런 평을 듣는 것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신파도 클리셰도 영화를 만드는 하나의 전략으로, 잘만 활용한다면 오히려 영화의 흥행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된다. 실제로 현재 <백두산>은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다른 천만 영화들과 비슷한 속도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백두산>을 보고 재미와 아쉬움을 모두 느낀 관객으로서, 지금부터 과연 이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아 마땅할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액션인가, 코미디인가


흔히 재난 영화의 장르(포털 사이트 표기 기준)라 하면 '드라마'가 필수에, 추가적으로 '액션''모험'이 더해진다. <해운대>, <타워>, <감기> 등 많은 재난 영화들이 그러했고, <백두산>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오직 <엑시트>만이 이 틀에서 벗어나 당당히 '액션, 코미디'라고 표기된 영화이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 <백두산> 또한 예고편이나 포스터와 달리 비장하고 급박한 분위기가 아니라 조금 더 가볍고 밝은 톤으로 진행되었다.


영화의 두 주연인 '조인창(하정우)'과 '리준평(이병헌)'을 <엑시트>의 '용남(조정석)'과 비교해보자. 용남은 본인이 아이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는 동네 놀이터의 '철봉남'으로 첫 등장했다. 이후로도 그는 혼자서 세상 진지하지만 4차원스러운 캐릭터로 움직이며 영화가 코미디임을 몸소 증명했는데, 마찬가지로 <백두산>도 주연들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려 했다.



폭탄 해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조인창은 갑자기 작전을 지휘하고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당혹감과 어리숙함을 보여주었고, 마치 야수와도 같이 냉혹한 이중스파이 리준평은 능글능글하고 장난기 많은 동네 아저씨 정도의 느낌을 풍겼다. 나쁘지 않았다. 만담을 벌이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대화나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띠쁘띠'. 다소 유치한 말장난이 주되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이미지와의 차이에서 오는 재미에 왕왕 웃을 수 있었다.


이대로 밝은 톤을 끝까지 유지했다면 재난 영화의 긴장감은 줄어들었겠지만, 무난하게 나쁘지 않은 연말 영화로 기억될 수 있었으리라. 앞서 말했듯이 이미 하정우와 이병헌이라는 두 배우의 케미만으로도 영화가 실패하기는 쉽지 않다. 둘의 네임 밸류처럼 연기도 호흡도 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지나치게 안전을 좇았다. 기존의 기조를 무너뜨리고 기어코 신파를 넣지 않으면 불안해서 영화를 끝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작중 조인창과 리준평은 서로를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각자 하나씩 보험을 만들어두는데 웬걸, 보험을 준비한 건 그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파의 폭풍 속에서


처음에 언급했듯 신파가 나쁜 건 아니다. 적절한 신파는 극에 몰입하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제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되듯, 막무가내식의 신파 때려 넣기는 영화의 평가를 떨어트릴 뿐이다. <엑시트>에도 신파는 있었다. 단지 그곳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이 결코 과잉에 빠지지 않았다. 가스 속에 갇혀버린 용남과 '의주(윤아)'의 심리를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들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론으로 형상화하여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신파를 적절히 섞으면서도 영화 전체의 톤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백두산>은 신파 없이 만들기가 더 어려운 영화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온 남편과 오랜 시간 딸을 떠나 있었던 아버지라는 설정은 신파의 표본이며, 무엇보다 이 영화가 연말 시즌에 개봉하는 가족 영화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신파극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중반까지 잘 이어가던 기조를 영화 종료 30분을 남기고 갑자기 바꾸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감독의 보험이었으리라.


슬픔도 절박함도 웃음으로 - <엑시트>


남과 북의 통신이 연결되어 인창과 그의 아내 '지영(배수지)'이 통화를 하는 순간부터 신파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서 두어 번은 했던 같은 말을 또 반복하더니 지영은 갑자기 진통을 시작하고, 그 시각 알고 보니 준평의 딸 '순옥(김시아)'은 실어증에 걸려있다는 게 밝혀진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지영이 병원으로 가자 때마침 병원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위기가 닥치고, 무표정하던 순옥은 폭탄을 들고 백두산으로 떠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눈물을 터트린다. 이 모든 것이 교차 편집되며 순식간에 쉴 틈 없이 몰아친다. 그야말로 신파의 종합 선물 세트로, 반드시 울리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쫓기듯이 욱여넣은 신파는 이야기에 스며들지 못했고, 이로 인해 전개의 개연성이 사라져 영화가 둘로 분절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신파에 대해서만 적었지만, 이외에도 지나치게 빠른 흐름으로 인한 억지스러운 연결, '남+북 vs 미국'의 대치를 넘어선 노골적인 선악 구도, '로버트(마동석)'의 서사에 묻어있는 국수주의적 메시지까지. 비판하고자 한다면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분노보다는 아쉬움을 표하고 싶다. 유치하고 뻔했을지언정 내가 중반까지 이 영화를 괜찮게 봤던 것은 사실이고, 후반의 '보험'만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평했을 것이다. 부디 앞으로의 영화들은 공식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재난 영화도 코미디일 수 있고, 신파가 강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공식을 벗어나는 불안에 독이 될 보험을 걸지 않는다면, 필히 한국 영화 시장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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