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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15. 2020

성장하는 마블과 길 잃은 DC

'히어로 무비'라고 '히어로'가 전부인 건 아니다

영화의 완성도나 흥행 성적으로는 아직이지만, 오래전부터 DC가 마블보다 한 발 앞서있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살린 명품 빌런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최근 들어 화두가 된 여성 슈퍼히어로의 솔로 무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유명하고 인기 있는 빌런을 논하는 자리에 '헬무트 제모'나 '벌쳐', '헬라', '타노스' 등 마블 출신 빌런들이 당연하다는 듯 거론되지만, 사실 MCU 페이즈 3(<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로키'를 제외하면 우리 기억에 남는 마블 빌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들은 캐릭터 그 자체가 아니라 히어로 누구누구의 적으로 기억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초반의 MCU는 영웅들의 기원을 그리며 대중에게 그들을 소개하는 것에 집중했었기에, 상대적으로 빌런 캐릭터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부족했다. 때문에 대다수가 단발성 사건을 일으킨 후 퇴장하는 1회성 빌런에 그쳤고, 스스로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 제한이 생기고 말았다. 영화 속에서 빌런의 역할은 그야말로 히어로의 데뷔를 빛내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MCU 페이즈 1, 2의 빌런들


<배트맨> 시리즈의 빌런들을 필두로 한 DC 소속의 빌런 캐릭터들은 영화 안팎으로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왔다. 그 예시는 '조커'라는 캐릭터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비단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만이 아니라 이전 작들에서도, 영화는 그가 마음껏 자신의 광기를 뽐내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물론 어쩌면 그것은 DC 코믹스가 아니라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위 '다크 히어로'라고 불리는 배트맨의 특성상 이야기에서 그와 빌런들의 관계가 중요하게 다뤄졌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빌런 스토리텔링이 갖추어졌으리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중요한 건 그것이 만화책 속을 벗어나 스크린에서도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지금의 DC 확장 유니버스(이하 'DCEU') 속에서는 이러한 DC의 장점이 보이지 않고 있지만, 영화 <조커>는 그들의 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배트맨>(1989), <다크 나이트>(2008), <조커>(2019)의 조커


<배트맨> 시리즈가 훌륭한 빌런 캐릭터들을 배출해냈다면, <원더우먼>은 여성 슈퍼히어로의 대중화를 이뤘다. 누군가의 사이드킥도 혹은 짝퉁도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지닌 슈퍼히어로로서 '원더우먼'이 지니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그렇기에 영화 <원더우먼>의 제작이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이고 말이다. DC와 마블을 비교할 때 자주 언급되던 것이 바로 '블랙 위도우'의 솔로 무비였는데, 작중에서 나름의 입지를 지니고 있으며 인기도 많은 그의 단독 주연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MCU가 진행되며 영화 <블랙 위도우>의 제작이 발표되는 순간까지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곳곳에서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원더우먼의 영화화와 블랙 위도우의 영화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스티스 리그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세 명을 중심으로 하듯, 어벤져스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그리고 토르의 3강 체제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 외의 캐릭터들은 조연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제로 블랙 위도우와 마찬가지로 '호크아이' 또한 단독 작품이 없으니 말이다.(후에 디즈니+에서 주연 드라마 공개 예정)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영화화가 이루어졌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극 중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그들이 의미 없이 소모되지는 않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마블 페이즈 1의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그저 주인공인 슈퍼히어로의 연인일 뿐이었고, 악당과 싸우며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를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당시의 그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영웅의 동기부여를 위한 장치 중 하나에 불과했다. 히어로가 활약할 위기 상황을 만들고, 역경을 이겨낸 히어로에게 키스를 전해주는 게 전부였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슈 또한 빌런 논란과 마찬가지로 MCU가 진행되며 개선되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굳이 '캡틴 마블'까지 가지 않더라도 '발키리'나 '와스프', '가모라'와 '페퍼 포츠' 등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마블의 영화들도 처음부터 완벽했거나 극찬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인피니티 스톤'이라는 명확한 아이템과 '타노스'라는 예정된 거대한 흑막,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과 함께 성장해 온 히어로들이 있었지만, 각 개별 작품의 빌런들을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었다. 아울러 지금의 그들은 성별과 인종을 아우르는 PC(정치적 올바름)의 선두주자이지만, 초반에는 그들 역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듯한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마블은 영리하고, 그렇기에 자신들의 단점을 그냥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해 지나간 빌런들을 재등장시키거나 변화해가는 여성상을 표현하는 등, 캐릭터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성장해간다는 긍정적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DC의 경우, 그들은 같은 시기에 마블이 받았던 비판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DC는 빌런의 이야기에 능통했으며, 그들의 조명은 남녀 모두를 비추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펼쳐진 DCEU는 처참했다. 영화 <원더우먼>의 성공적인 제작과 <아쿠아맨>의 '메라' 캐릭터 구축 등 여성 히어로에 대한 표현은 초기의 마블보다 앞서갔지만, 그들의 최대 무기인 빌런 스토리텔링이 증발해버렸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그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영웅 놀이와 감성팔이로 가득했고, '히어로로 가득한 극장가에 빌런 팀업 무비를 내놓았다'는 의의조차 남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원더우먼>의 '닥터 포이즌'과 '루덴도르프'는 흑막의 존재에 밀려 허무하게 퇴장하였으며, <아쿠아맨>의 '블랙 만타'와 '옴 마리우스'는 심리 묘사의 부재로 인해 파파보이와 마마보이로 절하되었다.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캐릭터들에게서 유치함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과거의 영광을 무너트리는 실책들이었다.



DCEU의 바깥에서는 여전히 <조커>와 같은 훌륭한 걸작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유니버스 내에도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처럼 비장미 있는 빌런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후의 빌런들이 제 매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DC가 영화의 방향성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연출에 있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에는 성공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덕분에, 당시 가장 화제가 되었던 '할리 퀸'을 메인으로 한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이 제작되었다. '빌런''여성'. DC에게 있어 자신들이 지닌 장점을 발휘하기에 이토록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과연 이 영화는 DC의 완전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을까? 우려를 꺾고 이번에는 대중과 평단 어느 한쪽에게라도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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