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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19. 2020

DC도 아니고 PC도 아닌, <버즈 오브 프레이>

우려를 배신하지 않은 그들만의 리그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본래 DC에게는 마블과는 차별화된 그들만의 장점이 있었다. DC는 슈퍼히어로에게 있어 그들 자신의 능력이나 기원만큼 그들과 대치하는 빌런 역시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조차 못했고, 이제는 결국 그것이 마블의 강점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DC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할리 퀸'.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등장했던 이 캐릭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많은 대중들이 그의 이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이 제작되었고, 소위 '닦이'라 불렸다는 우려가 남아있는 한편, '빌런'과 '여성'이라는 두 키워드를 모두 지닌 이 영화가 DC의 오명을 씻어낼 거라는 희망적인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기대 대신 우려의 손을 잡았다. 제목이 왜 <버즈 오브 프레이>냐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부제처럼 할리 퀸이라는 캐릭터의 '황홀한 해방'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 영화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그냥 워너비 데드풀글로벌 걸캅스였다.



할리 퀸은 원래부터 빌런이었다. 사실 어떠한 캐릭터가 히어로인지 빌런인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굳이 말하자면 빌런으로 자주 다뤄진 인물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극의 주인공으로서도, 그리고 아이를 지키는 역할로서도 일종의 히어로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와 대립하는 새로운 빌런 역할이 필요했고, '로만 시오니스(이완 맥그리거)'가 그 자리에 올랐다.


대부분의 배트맨 시리즈 빌런들이 그러하듯 로만 또한 고담의 뒷 세계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조직의 장으로, 작중 등장하는 화학 공장이 그의 가문 소유이며, 로만 개인도 고담의 수많은 용병들을 원하는 대로 휘두를 정도의 막대한 부를 지니고 있었다. 마블 코믹스의 '킹핀'이나 같은 DC 코믹스의 '펭귄', '투페이스' 그리고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의 '조커'처럼 부하들을 거느린 그의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이고 위압적이었으며, 한 작품의 메인 빌런으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 앞에는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화 속 로만은 어땠는가. 무언가 있다는 분위기만 풍길 뿐 정작 그의 이야기가 화면에 비치지는 않았다. 그의 히스테릭한 성격이나 여성에 대한 혐오에 배경이 있을 듯하면서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설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로만은 얼굴에 해골 모양의 검은 가면을 쓰고 다니기에 '블랙 마스크'라 불렸는데, 대체 그가 왜 마스크를 쓰는지, 아지트에 가면과 조각상들을 장식해놓은 이유는 무엇인지, 관객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도 우리가 영화 <조커>에서 본 것만 같은 과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영화가 그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로만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그저 그런 빌런으로 지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는 그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로 향하는 조명을 걷어냈다. 로만은 주인공에 맞서는 메인 빌런으로서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빌런들은 모두 조직의 장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 로만, 블랙 마스크도 그래야만 했다. 마치 애정결핍 어린아이 같았던 영화 속 모습과는 달라야만 했던 것이다. 작중 할리 퀸의 대사처럼, 그는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투정 부리고 억지를 부리고, 부하인 '빅터'에게 의존하는 모습은 그를 삼류 악역으로 끌어내렸다.


액션씬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지능형 빌런들이 전투 없이 자신의 힘을 증명해왔으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그에게서 지능적인 면모조차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 할리 퀸 일행과의 전투 후 이어지는 그의 최후는 관객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넘어 허무함까지 느껴지게 한, 아둔함의 극치였다. 안개가 자욱한 다리 위라는 멋스러운 배경까지 만들었으면서, 정작 그들의 전투는 어느샌가 로만의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던 수류탄 하나로 끝나버렸다. 마땅한 액션의 합도, 대화의 합도 보여주지 못한 채 자그마한 폭발 하나로 상황이 종료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로만에 대한, 빌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DC가 보여주었던 빌런 스토리텔링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빌런을 존중조차 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어버렸다. DC가 DC도 못한 꼴이다.



'빌런'이 실패했다면 '여성'은 어땠을까. 이 영화는 분명 여성들을 앞세우며 PC 흐름을 탈 심산이었겠지만, 완성된 영화는 PC도 무엇도 아닌 그저 젠더 갈등의 산물이었다. 여성들이 모여 팀을 이루었다거나 빌런이 남성이라는 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로만과 빅터를 굳이 여성 혐오자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들은 그저 여성을 혐오할 뿐이었다. 작중 'Brothers'나 'Men of Gotham' 등 남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로만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쓰였고, 그가 할리 퀸을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Have a vagina'라며 아주 직설적으로 그의 여성 혐오를 드러냈다.


물론 빌런이 특정 성별을 혐오할 수도 있다. 그러니 빌런이 된 거겠지. 하지만 그런 캐릭터를 그린다면 그에 대한 충분하며 납득 가능한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은 그 인물이 왜 여성 혹은 남성을 혐오하는지 이유를 상상해야만 하고, 그 결과 누군가는 '저 캐릭터가 남성/여성이라 반대 성별을 혐오한다'는 억지 논리를 펼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 전체에 젠더 갈등이 진하게 녹아있어서 그런지, 경찰인 '르네 몬토야'의 공적을 가로챈 사람이 남성이라는 것까지 혹 이러한 흐름에서 의도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은 많은 기대를 받았고, DC는 그 기대에 부응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중의 기대가 아니라 우려를 붙잡았고, '빌런'과 '여성'이라는 그들의 장점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MCU와 <데드풀>의 영향을 받은 건지 지나치게 가벼워진 DC의 영화들에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매력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 연쇄로 인해 빌런들의 매력은 격하됐다. 과연 계속해서 DCEU에 기대를 걸어도 괜찮을까. 그럴 만한 가치가 그들에게 아직도 남아있을까. 그런 의문을 일으키는 안타까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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