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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11. 2020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엔드게임 속 아쉬움들

<어벤져스: 엔드게임> 1부, 영화를 위한 선택

훗날 누군가 2010년대를 되돌아본다면, 이 시기를 혐오와 차별 그리고 분쟁이 심화된 암흑기라 부를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계속되어오던 극과 극의 대립이 SNS 등에서의 증오발언으로 확산되었고, IS의 등장은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에 몰아넣었다. 글로벌 우경화에 맞서 시작된 진보주의 운동은 '차별과 역차별'이라는 또 다른 논쟁을 야기했으며,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혐오를 퍼붓는 도돌이표가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어두운 시기일수록 빛이 더 밝게 보이는 법. 나는 2010년대를 연대(連帶)의 시기로 기억한다. 물론 정치나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연대가 이루어졌지만, 나는 그보다 문화적인 부분에 시선이 갔다. 마블, 정확히는 MCU가 우리들의 문화적 연대를 일궈낸 것이다. 소위 'OSMU'라 불리는 매체 간 연계나 '크로스오버' 수준의 미디어 합작은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왔다. 트랜스포머나 디즈니 프랜차이즈가 전자의 대표주자였으며, 과거 일본의 특촬물이나 미국의 코믹스 등이 후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완구와 영화 OSMU (좌), 고지라와 킹콩 크로스오버 (우)


MCU 또한 결국 OSMU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마블의 <어벤져스>라는 하나의 소스가 수많은 개별 소스(슈퍼히어로)들의 연대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 연대에 관객들까지 함께했다는 점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연대를 통한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었다. 그 연대의 정점이자 2010년대의 상징으로 기억될 작품인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부터 벌써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영화는 분명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결코 완벽하지는 않았다. 상영시간의 압박 때문인지 다소 무리한 선택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개연성이 무너져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말았다. 훌륭한 헌사였으나 부실한 서사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감정이 벅차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냉정하게 영화를 바라볼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아쉬웠던 점들을 지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시작을 위한 선택, 앤트맨


<엔드게임>이 시작하자마자 타노스를 찾아간 히어로들이 마주한 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확정 선고였다. 그들에게는 비극을 되돌릴 수 없다는 허무함과 무력감만이 남았고, 이후 5년 간 그들은 그저 오늘을 이어나가길 계속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지만, 남아 있는 이들 중 사라진 인피니티 스톤을 대체할 초인은 없었다.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는 먼지가 됐고, 토니 스타크의 마법 같은 과학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지키고자 했으며, 토르와 캡틴 마블 역시 초인적인 힘을 지녔을 뿐, 상황을 타개할 판타지적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관객들도 예상했으리라, 앤트맨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양자 영역에서 돌아온 스콧 랭(앤트맨)


말하자면 앤트맨의 귀환은 이야기의 시작을 위한 선택이었다. 히어로들에게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Endgame(최종 단계)이 시작됨을 알리는 역할은 오직 앤트맨만이 가능했다. 또한 이는 전편에 출연하지 않았던 앤트맨이 영화에 녹아드는 당위성을 마련했기에 관객 입장에서도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시퀀스를 채택함에 있어 지나치게 우연과 추측에 의존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앤트맨이 양자 영역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지나가다 스위치를 툭 건드려 준 생쥐 덕분이라는 설명은 약과요, 대체 양자 터널이 설치된 자동차가 왜 물품 보관소에 들어가 있는지, 누가 어떻게 알고 보관함 앞에 'Lang'이라고 이름을 적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조차 없었다.


쥐의 등장은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14,000,605분의 1의 가능성이 일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자동차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앤트맨과 와스프>의 쿠키영상에서 차는 주차장에 있었고, 주변에는 각종 장비들이 늘어져 있었다. 이후 <엔드게임>으로 돌아와서는 삭막해진 도시를 비추며 거리와 주차장에 버려진 차들을 화면에 담았는데, 다른 차들은 방치하면서 굳이 이 차를 보관소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양자 터널이 설치된 루이스의 자동차


그것은 필시 이 자동차가 중요한 아이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스콧의 지인이 사라진 그를 추적하던 중 차를 발견했다는 설명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무언가 실험의 흔적이 있었기에 차를 보관소에 맡기지 않고 직접 보관하며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터널을 작동시켰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생쥐가 아니라 사람에 의한, 조금 더 개연성 있는 귀환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마무리를 위한 선택, 헐크와 배너


<엔드게임>이라는 영화는 그 개별 작품으로서의 이야기와 함께 '인피니티 사가'라는 큰 흐름의 마무리도 동시에 진행해야만 했다. MCU 제1막의 주역인 어벤져스 원년멤버들은 대부분 이 영화를 끝으로 이야기에서 물러나기에, <엔드게임>에서 그들의 캐릭터 서사에 마침표를 찍어줄 필요가 있었다. 영웅들의 고뇌와 성장은 마블의 큰 특징 중 하나였고, 각자의 솔로 무비에서 캐릭터들은 이를 이뤄왔다. 그리고 마침내 <엔드게임>에 이르러 토니는 아이언맨이 되었고, 캡틴 아메리카는 스티브 로저스가 되었으며, 토르 또한 새로운 성장의 시작을 알렸다.


헐크, 브루스 배너도 계속 스스로와 갈등해왔다. '헐크'와 '배너'라는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하면서 벌어지는 신체의 주도권 경쟁, '존경받는 박사 배너'와 '두려운 녹색 괴물 헐크'라는 대중의 온도 차, 그러나 전투만 벌어지면 모두 헐크를 찾는 아이러니. 사실 헐크라는 캐릭터의 이야기는 누구보다 명백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어벤져스>부터 <토르: 라그나로크>까지 둘의 갈등이 강조되어왔고, <인피니티 워>에서 둘 사이에 대화의 기류가 흐르며, 이후 헐크와 배너의 이야기가 <엔드게임>에서 마무리되리라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헐크 (좌)와 배너 (우)


그 예상대로 <엔드게임>에서 헐크의 육체와 배너의 지식을 겸비했다는 일명 '스마트 헐크'가 등장했다. 이는 분명 서사의 마무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감마선에 의해 헐크가 탄생한 이후 두 인격은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인피니티 워>에서 둘 모두가 타노스에게 패배하여 복수를 위해 힘을 합치게 되었다는 귀결은 단순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쉬운, 딱 헐크의 서사에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서 갈등의 해결 과정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전 우주적 참사에 비해 그의 내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상영시간의 문제였을까. 그는 이미 모든 갈등이 해결된 상태로 등장해 그 과정을 대사 단 몇 마디로 정리해버렸다. 심지어 그 몇 마디의 설명에는 설득력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말이다. 현재의 인격이 헐크와 배너의 합의를 통한 것인지, 아니면 배너가 헐크를 장악하여 그의 강함을 얻은 것인지, 관객은 추측할 뿐 확인할 길이 없었다. 또한 대체 타노스를 쓰러트린 이후 둘이 합쳐져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마트 헐크의 등장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본 우리들은 알고 있다. 토니가 만든 인피니티 건틀렛을 착용해 모두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헐크의 내구와 배너의 인격이 모두 필요했다는 것을. 이야기의 시작을 위해 앤트맨이 필요했듯, 마무리를 위해서는 스마트 헐크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했다.


그러나 작중 배너가 헐크와 합쳐졌을 당시는 아직 앤트맨이 희망을 가져오기 전이었기에, 그의 업그레이드에 마땅한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시간에 쫓기던 끝에, 갈등하던 둘을 하나로 합쳐 문제를 단순히 해소시켜버린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솔로 무비가 없는 헐크이기에 캐릭터 서사에 어려움이 따랐겠지만, 조금만 더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면 그의 변화에 지금보다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엔드게임>이 개봉했을 당시에만 해도 10번도 넘게 관람했었기에, 어색하고 아쉬운 부분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워 머신의 농담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캡틴 마블 역시 타노스와의 접전은 훌륭했으나 비행 장면에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했다. 1년 전에는 이러한 아쉬움들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 영화의 감상을 해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꾸만 눈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는 이를 아쉬움이 아니라 결점으로 여겼으며, 때문에 영화를 이해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재개봉을 통해 다시 한 번 스크린 앞에 앉을 기회가 찾아왔고, 이번에는 왜 영화가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에 대해 고민하며 새롭게 영화를 곱씹을 수 있었다. 여전히 아쉽지만 그래도 이랬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작년보다 한층 더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다음으로 이어질 2부에서는 호불호가 나뉘었던 어떤 캐릭터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어줄 누군가도 나처럼 영화를 또 한 번 즐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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