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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20. 2020

은유적이기에 더욱 뚜렷한 비극, <더 플랫폼>

무한경쟁 사회의 실체를 드러내다

바뀌지 않는 지옥 같은 세상을 향한, 잔혹하고도 지독한 은유.


무한경쟁헬조선, 수저계급론까지.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이 이러한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마는, 그런 일상적인 단어가 돼 있었다.




언어라는 것은 하나의 기호이자 약속이기에, 사용 집단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기도 하며 아예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표준어로 인정받으며,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유행어가 잊히는 식으로 말이다. 신조어도 마찬가지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막연한 관념이, 보다 또렷하고 거대해져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신조어다. 때문에 신조어를 보면, 그 언어 집단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에 불만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헬조선'과 같이 명쾌할 정도로 직관적인 단어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끝없는 경쟁과 부조리에 분노했음을 나타낸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이 단어가 대중으로 퍼지고 언론에 오르며,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그 해결을 촉구하는 일종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곧바로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여전히 계속되는 경기 침체와 불공정까지,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바뀌지 않는 세상에 질려버린 걸까. 이제 '헬조선'이라는 말에서는 분노가 아니라 자조(自嘲)만이 느껴졌다.


*이 앞에는 <더 플랫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한정된 식량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라는 씁쓸하면서도 흥미로운 논의를 던지며 시작한다. 수직으로 긴 감옥은 층층이 나뉘어 있고, 각 층마다 두 명의 사람이 배정되어 있다. 매일 때가 되면 꼭대기에서 음식이 가득 차려진 '플랫폼'이 내려오며,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원하는 만큼씩 음식을 먹어치워 간다. 다행히 식사에 시간제한이 있어 첫 번째 층에서 음식이 다 떨어질 일은 없지만, 그 양에는 제한이 없기에 위에서 많이 취한다면 아래에는 빈 접시와 찌꺼기들만이 도착하는 비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 '고렝'은 이 비극을 끝내려는 인물 중 하나였다.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는 상층남겨진 부스러기를 줍는 중층, 그리고 살기 위해 손에 칼을 든 하층으로 나뉜 감옥의 상하구조를 없애고 그 속에서 연대를 이루고자 했다. 각자 꼭 필요한 만큼만 먹자. 다음 층을 위해 먹을 걸 남겨두자. 이 지옥 같은 감옥에  대신 을 들고 들어온 그는, 그야말로 도덕과 품위를 지키는 이성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이 많이 먹겠다는 이기심에 움직였던 것이 아니었다. 마치 현실처럼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식사 외에 감옥의 큰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 달마다 사람들의 위치가 무작위로 바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 6층에서 풍족한 생활을 보내던 사람이 다음 달이 되자 100층으로 떨어져 텅 빈 접시만 바라볼 수도 있으며, 당연히 그 반대도 일어날 수 있다. 또 '운이 좋아 위쪽에만 머무르는 사람'과 '운이 없어 아래에서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 다시 말해 금수저흙수저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운이라는 요소에 의해 자기 위치가 결정되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 아래에서 굶주렸으니 이제는 취하겠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내가 먹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피해의식 등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모여 감옥의 상하구조를 세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발적 연대를 외쳤고, 누군가는 대화를 통한 설득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움직였던 건 위쪽으로부터의 협박과 폭력이었다. 이성을 상징하는 책도, 연대와 도움을 요하는 반려견과 밧줄도 모두, 홈쇼핑으로 산 칼 한 자루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위에는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고, 아래는 살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했다. 누구 하나가 나서서 바꿀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곳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333층의 감옥에 모인 666명의 죄수들은 현실이 바뀌지 않음을 이미 받아들여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고렝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비극 속에서 그 역시 스스로 책을 찢고 유리조각을 손에 들며 다른 이들과 같아졌었지만, 다시 한번 일어나 무한경쟁을 끝낼 새로운 희망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 최하층에 숨어 있던 아이를 위로 올려 보내 감옥의 운영진에게 안 쪽의 상황을 알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시설의 원칙상 16세 이하는 들어올 수가 없으니, 아이는 필히 그 안에서 태어난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아이는 '지옥으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지옥에서 태어난 존재'가 된다.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빼앗고 죽이는 비극 속에서도 생명이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 변화의 메시지가 될 희망이었다.


하지만 필히 그 아이도 메시지가 되지는 못하리라. 아이를 감옥 밖으로 올려 보낸다 한들, 도달한 그곳 또한 지옥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시설 직원들의 양심을 믿었지만, 그들에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감옥 내부에서 식량을 둔 생존경쟁을 벌이듯, 외부에서는 일자리를 건 경제적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 속에 잠시 비친 직원들의 모습은 마치 층으로 나뉜 것처럼 직급에 의해 위아래로 이분되어 있었다. 발 한 번 삐끗하면 떨어지고 마는 경쟁사회에서 트러블은 피하는 게 상책이기에, 아마 그들도 양심을 찾기 전에 문제를 덮느라 급급하지 않을까.



영화는 구태여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는 플랫폼을 타고 위로 향했지만, 이후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옥 같은 감옥은 바뀌었을 수도 있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후자의 가능성에 손을 들었다. 주인공이 떨어진 감옥 속 세상처럼, 관객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또한 경쟁이 끊이지 않는 지옥도와 같다. 때문에 우리는 엔딩을 보며 희망적이기보다는 자조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상상되는 뒷 이야기에 영화가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는 무한경쟁으로 상징되는 현대 사회를 상하구조의 감옥으로 표현하여, 그 속의 문제들을 보다 뚜렷하게 담아냈다. <기생충>이 그러했고 <조커>가 그러했듯이, 이 영화에도 관객들에게 불쾌감이나 좌절감을 남기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비극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문제의 실체를 직시하며 해결이 필요함을 다시금 느끼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한 명 한 명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모여 정말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기를 바라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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