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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27. 2020

나도 참 내가 싫었다, <톰보이>

멈추는 용기와 나아가는 용기

어느새 그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세상에는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참 많다. 우중충한 날씨부터 출근길의 지옥철,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사까지. 물론 그중 제일은 사람에 대한 불만이 아닐까.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런 걸까? 좀 안 그러면 좋을 텐데." 사람들을 보다 보면 심심찮게 그런 생각이 든다. 내 머릿속 이상과 다른 눈 앞의 현실에, 우리는 불만을 느낀다. 당연하게도 이는 타인에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울을 통해 직시한 스스로에게조차 우리는 불평한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바로 나 자신이기에, 나의 부족한 점이나 못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과 다른 점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10년도 더 전부터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직접적인 핍박이나 차별은 줄었더라도, 지금까지 쌓여온 고정관념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도 '평범'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게 된다. 사회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분명 나 자신일 텐데, 어째서인지 나 자신을 놓고 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실은 잘못된 게 아닌데. 당당히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해서는 안 되는 건데. 괜스레 스스로를 자책하고 부끄럽게 느꼈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이 그때는 참 싫었다.




영화 <톰보이>의 주인공 '로레'는 영화의 제목처럼 '톰보이(tomboy)' 즉, 남자 같은 여자아이였다. 핑크보다 파랑을, 소꿉놀이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며 짧은 머리에 반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남자아이 그 자체였다. 어쩌면 로레는 그런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자랑스러워하지도, 특별히 불만을 갖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속한 '아이들 세계'에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어른들 세계'에도, 고정된 성역할이라는 게 존재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따로 있고, 남녀는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잘못된 믿음. 다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지적하고 고쳐버리려는 일방적 태도. 로레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세상은 그를 부정부터 하려 했다.


난 미카엘이야.


로레는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으면서 세상의 불만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 집 안에서는 남자 같으면서도 여자아이인 '로레'로, 바깥에서는 평범한 남자아이 '미카엘'로, 이중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페르소나를 만든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로레는 이 미카엘이라는 가면에 너무 빠져버렸던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여자라고 들킬까 조마조마했고,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매일 저녁 거울 앞에 서서 남자아이가 되는 연습을 했다. 주변 남자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 하며, 자신도 그들과 같아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삶의 운전대는 로레가 아닌 미카엘이 잡고 있었고, 그렇게 그 삶은 '남자아이의 삶'이 되어버렸다. 미카엘은 이제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몸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로 있기 위해서는 계속 남자아이로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평범하게 보이고자 노력했던 평범한 아이 중 하나였다. 파랑보다 핑크를 좋아했고, 축구보다 소꿉놀이가 더 재밌었다. 자동차나 로봇이 왜 멋있는지는 몰랐지만, 인형을 안으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왜 남자가 피구를 하면 안 되는지는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면 나만 그랬던 게 아니던데, 그때는 왜 다들 '나'를 숨기고 다녔을까. 때로는 나도 로레처럼, 다른 성별이라면 덜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치마를 입고 머리핀을 꽂아도 나는 너무 남자아이였는 걸.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나' 대신 '있지도 않은 여동생'을 만들기로 했었다.


이건 남자 놀이, 이건 여자 색깔… 내게는 그런 게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학습하게 되더라. 다른 아이들을 보며 어떤 게 평범한 건지 자연스레 알아갔다. 어쩌면 그래서 나도 로레와 비슷한 해결책을 내놓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 시절 아이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지 않았을까.




잘 숨겨왔다 생각했겠지만, 결국 너무나 일상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로레는 엄마에게 미카엘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다. 남자아이라면 혹은 여자아이였다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갔을 일이었지만, 그 틀에 걸쳐있는 로레/미카엘에게는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지 않았을까. 당연히 일어나리라 예상했던 일인데도, 영화를 보며 가장 쓰라린 장면이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이해가 됐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꼭 저래야만 했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고, 감정이 북받쳐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에게 벌을 주거나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줄래?
난 정말 모르겠거든.


하지만 한 순간,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대사에서 내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더라. 나도 알고 있다. 좋게 타이르듯 포장해도 그것은 결국 강권이며, 아이에게는 지독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이 로레의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라. 그 어머니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고 어떤 것들을 느껴왔을지,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남들과 다른 아이에게 그저 평범하기를, 모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틀에서 벗어난 아이가 받게 될 시선의 수를 알기에, 설령 그 행동조차 옳지 않았음에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빈말로라도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악을 피하기 위해 당시에 생각할 수 있던 최선의 답이었다.




어찌 보면 로레는 커다란 행운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부모, 그런 동생, 그리고 그런 친구를 만나는 건 결코 쉽지도 흔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터무니없고 영화같은 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실재할 수 있다. 아이를 믿는 용기. 손을 내미는 용기. 내민 손을 잡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 그저 세상에 떠밀려가거나 자기 생각에 끌려가서는, 기적을 일궈낼 수 없다.


때로는 잠시 멈춰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로레의 엄마는 딸의 행동을 알게 된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의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 하룻밤 시간을 가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나를 돌아보고 상대를 이해하려 하며 최선의 답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또 때로는 용기있는 한 걸음을 내딛을 필요도 있다. 싫다고 치부한 채 피해왔던 스스로와 마주할 때, 비로소 자신과 타인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영화 마지막 로레의 미소는 이러한 용기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수줍게 피어날 수 있던 게 아닐까. 아이들의 마음이 불만이나 불안 대신 행복으로 가득차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난 로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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