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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an 27. 2020

죽음을 맞이하는 같지만 다른 자세

영화 <페어웰>과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지혜를 쌓으며 수많은 한계들을 극복해왔다.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거나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은 기본이요, 평균 수명 또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끝'이 존재한다.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거나 누군가가 100세를 넘겼다는 소식들은 종종 들려오지만, 아직까지 불로초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온갖 질병과 범죄,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고작 노화를 막는 풀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모두 언젠가 확실하게 죽는다. 개인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그 시기나 원인에 차이는 있겠지만, Yes인가 No인가의 양자택일이라면 답은 Yes로 모두 같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죽음을 자각하며 살고 있을까? 혹시 바쁜 일상에 치여 의식하지 못하거나 막연히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린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며, 공동체 속에서 두려움은 논의의 주제가 되기보다 쉬쉬거려지며 금기시되는 법이니 말이다.



영화 <페어웰>의 이야기는 주인공 '빌리(아콰피나)'의 할머니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에게 의사로부터 3개월 시한부 판정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손주의 거짓 결혼식을 꾸며 온 가족이 모이기로 했다. 미국과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에 모이지 못했던 가족들은 이번 만남에 있어 단 하나의 규칙세웠는데, 그건 바로 절대 할머니에게 폐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한 것. 눈물을 보여서도 안 되고, 슬픈 내색을 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 죽음이라는 짐을 지지 않게 하려는 가족의 결정이었다.


소위 '선의의 거짓말' 혹은 '하얀 거짓말'이라 부르는 것으로, 세계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문화다. 나 역시 이러한 거짓말을 부탁받은 적이 있으며 때로는 내가 직접 하기도 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계속 웃어주었으면 해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결국은 모두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죽음이라는 중대사와 연관된 경우에도 여전히 배려가 되는 걸까?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주인공 '나'와 췌장암에 걸린 소녀 '야마우치 사쿠라'가 엮이며 겪는 변화와 성장의 이야기다. 같은 시한부 환자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이 책의 상황은 <페어웰>과는 조금 다른데, 가족들이 할머니에게 진실을 숨겼던 <페어웰>과 달리, 사쿠라는 자신의 병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남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 작중 그녀의 실제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가족들과 의사, 그리고 주인공뿐이었다. 이들은 <페어웰>의 빌리처럼 암에 대해 주변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사쿠라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도 남은 삶을 눈물과 보내는 것도 싫다며 이를 거절했다.


사쿠라는 이상하리만치 씩씩하고 밝았다. 미래가 없음에도 미래지향적이었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았다. '살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살아있었다. 작중 누구보다 죽음을 느끼고 있었을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생기 넘쳤던 것이다. 이는 그녀의 가치관 때문인데, 그녀는 누구에게나 하루의 가치는 똑같다고 여겼다. 사람은 모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신도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르지 않으며, 결국 중요한 건 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어웰>의 가족들과 <췌장>의 사쿠라가 시한부 사실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둘 다 상대방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양 쪽의 자세가 달랐다. 영화 속 빌리의 큰아빠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편해지고자 하는 개인주의적 행동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 짐을 할머니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죽음을 남아있는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해 사쿠라는 죽음이라는 짐은 누구나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한부 당사자나 그 가족이 홀로 그 무게를 견디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좋았던 점이라면
매일매일 살아있다고 실감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야.


나는 우리 삶이 유한함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러함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그 소중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나는 내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전에는 이런 집착에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했었지만, 나도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를 바꿨다. 사쿠라가 '투병(鬪病, 병과 싸움)' 대신 '공병(共病, 병과 함께함)'이라 말하듯,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도 그곳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언젠가 찾아올 그 날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살기로 했다.


<페어웰>의 가족들은 애써 웃어 보이지만 진실을 알고 있기에 이따금 표정에 감정이 새어 나왔고, 이는 할머니에게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처럼 나 또한 자신의 짐도, 다른 이의 짐도 모두 내가 혼자 짊어지려고 했었다. 그러나 시작이 배려와 걱정이었을지언정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부담이 될 뿐이었다. 선의의 거짓말도 좋지만 상대방을 믿고 함께 걸어가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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