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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09. 2020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를 구하지 마세요>

내 곁에는 항상 따스함이 있었음을

*이 글은 어머니와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을 사랑하는 어머니께 바칩니다.


무엇을 숨기랴, 나는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이 영화에 절실한 공감은 못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어리고 부족하기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색안경이 벗겨지지 않았기에. 조금만, 조금만 더 경험을 쌓고 시야를 넓힌다면 그때는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지금은 절반만 이해했다. 영화 속 모녀가 무엇을 느꼈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극장을 나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머리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들의 감정에 손가락이 살짝 닿았을 뿐, 그 끝에는 여전히 닿지 못했다. 물론 애초에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서로의 경험이 다르니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최대한 상대방이 품고 있을 감정에 다가가는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부르는 것이겠지. 나는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다. 꼭 모두에게 공감할 필요는 없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그들 만큼은 진심으로 마주하고 싶다. 나조차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러고만 싶다.



나는 때때로 너무나도 쉽게 말을 던질 때가 있다. "나는 그랬으니까." "나는 했는데, 넌 왜 못 해?" "그건 용기가 부족해서 그래. 겁쟁이인 거지." 정말, 이렇게 적고 보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들인데, 그걸 내가 하고 있었다니. 그 사람들도 속상했겠지. 화가 났었겠지. 처음으로 거울을 본 듯한 기분이다……. 끝나지 않을 부끄러움과 자기혐오는 잠시 뒤로 하고, 여하튼 이전의 나는 자신이 이겨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쉽게 쉽게 답을 내리곤 했다. 인간관계를 끊는 일이나 삶을 정리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내 태도는 언제나 가볍고 날카로웠다.


의절, 이혼, 자살……. 나는 그러한 것들을 긍정한다고 믿었다. 모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행동들이며, 그렇기에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잘못한 게 없는데도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나라도 그들의 변호인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오히려 진짜 겁쟁이는 바로 나 자신이었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멀리하고 있었다.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곁에서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덕분이었는데. 모든 짐을 혼자서 짊어지지 말라는 말, 앞으로는 웃으며 살아가자는 그 말 덕분이었는데, 나는 그걸 내 마음의 강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착각했기에 거만했고, 그렇기에 결국 경솔했다. 자신에게 씌워진 색안경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을 겁쟁이로 폄하해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깨우쳐졌다. 분명 같은 영화를 봤는데도 어머니의 표정은 나와 달랐다.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거의 감독님께 질문하듯 마음에 남은 응어리를 어머니께 쏟아내었다.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번에 알겠더라. 내가 감정에 묻히고 색안경에 가려져 시야가 너무 좁아져 있었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던 거였는데, 그 순간에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영화 속 모녀에게 이토록 공감하려는 이유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사죄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엄마(양소민)'가 '선유(조서연)'에게 했던 말들은 곧 스스로에게 외치는 격려와 같았다. 꾸며낸 웃음조차 나오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애써 웃어 보였다. 내가 지켜줘야 하고 내가 버팀목이 되어줘야 하는 아이가 있었기에, 한 계단 한 계단 조금이라도 더 위로 몸을 이끌었다. 위도 아래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구렁텅이 속을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서. 미술 선생님을 하던 사람이 고깃집 서빙부터 상하차까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삶이었지만,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더 밝게 웃으며 힘내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현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빛이 보일 기미조차 없다니. 주위를 가득 메운 지독한 현실이 주는 것은 오로지 좌절뿐이었다. 아, 안 되는구나. 정말 안 되는구나……. 죽으려는 게 아니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 피어난다고 하더라.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이대로 계속해도 달라질 것 같지가 않을 때. 저쪽이 너무 편안해 보인다면, 침대를 향해 지친 몸을 던지듯 그저 조금 쉬고 싶어 지지 않을까.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쉽사리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결국 엄마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현실과 마주했다. 내가 없으면 아이는 누가 지켜주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는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엄마는 쓰린 가슴을 붙잡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를 만나러 가지 않겠냐고. 선유는 엄마의 질문에 함께 가겠다고 답했다. 엄마를 따라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분명 선유는 예상했으리라. 5학년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눈치가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선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나도 그랬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다. 생각의 깊이란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사고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법. 지금의 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넘쳐나는데, 훨씬 더 경험이 적었던 그때는 어땠을까. 생각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나이에는 그 나이의 생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선유는 엄마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선유는 결코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 아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엄마가 떠난 세상이 더 두려웠을 테니까.


선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저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택했다. 그렇기에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고 속삭였던 게 아닐까.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버리면 엄마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될 테니까. 눈부신 햇살도 볼 수 없고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먹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 어떤 아쉬움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엄마가 사라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거나 외식을 하지 못해도, 멋진 아파트가 아니라 시끄러운 리빙텔에 살아도, 불평 한 마디 내놓지 않던 아이였으니 말이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는 악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단순히 화면에 보이지 않거나 빠르게 지나갔을 뿐이지, 선유네 가족을 쫓아다니는 그림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명백한 악인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주변 인물들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감독의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썽꾸러기 같으면서도 배려심 깊은 '정국(최로운)'이라는 아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곁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진짜 어른 같은 사람. 이 영화는 그런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따스한지를, 그리고 그러한 따스함이 우리들 주변에도 있다는 희망을 전하려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게 기대어 조금이나마 힘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이와 같은 마음이지만, 한 평씩 마음을 넓혀간다면 어느 순간 조금은 더 커진 스스로와 마주칠 수 있겠지. 그 날이 올 수 있도록, 지금은 밝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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