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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06. 2020

영화와 내가 겹쳐질 때, <남매의 여름밤>

당신이 창작자라면 꼭 봐야 할 영화

제철음식이라는 게 있다. 그 시기에만 얻을 수 있거나 혹은 그때 먹어야 가장 맛있는 음식들 말이다. 얼마 전 영화를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영화에도 제철이 있구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우스 재배를 통해 사시사철 원하는 과일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듯이, 극장에는 언제나 높은 퀄리티의 영화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 제철이라니. 이전까지는 내게 있어어도 '영화'와 '제철'은 서로 엮일 일 없는 동떨어진 단어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유난히 더 맛있고 특별히 더 와닿는 영화들이 있더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관계없이 내게 있어 조금 더 기억에 남는 영화. 그런 영화와 만나는 순간에는 마치 제철에 딴 과일을 베어 무는 듯한 황홀감에 가슴이 설레곤 한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오는 이맘때. 태풍이 지나가고 찾아오는 소슬바람처럼. 우리를 지나간 기억 속에 잠겨 들게 하는 영화들이 찾아온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담담함이야말로 영화의 매력이다. 조용히 우리의 일상을 비추며 위로를 건네는 따스함에 나는 처음으로 제철이 왔음을 느꼈다. 작년에 개봉한 <우리집>과 <벌새>를 시작으로 올해의 <남매의 여름밤>까지. 모두 별다른 기교 없이 가족의 모습을 담는 것만으로 수많은 감정들을 일으켰다. 괜스레 슬퍼지고 또 괜스레 흐뭇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영화를 보았다는 감상을 받았다.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영화가 우리에게 어디까지 설명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잠시 생각해보자. 그것이 영화든 글이든, 창작자에게 있어 작품은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등을 이야기에 빗대어 풀어내는 것이 바로 창작이다. 그렇다면 뻔한 이야기다. 출생 레퍼토리로 시작되는 상투적인 자소서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설명 하나 없이 혼자만 아는 내용을 툭 던져놓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노파심에 하나하나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 또한 우리를 지치게 한다. '설명충'이나 '투 머치 토커'라는 신조어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적당한 생략과 적당한 설명. 그 선을 잘 찾아내는 것이 좋은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진다.


나는 결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고, 혹여나 그 의도가 전해지지 않을까 자꾸만 사족을 늘려 갔다. 마치 속이 텅 빈 공갈빵처럼. 글의 길이만 길어질 뿐 정작 실속은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과시하고 싶어 했다. "나 이만큼 알아요!"라고 자랑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문장 하나 글자 하나 줄이지를 못했다. 하지만 어린 고집일수록 진짜 어른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법.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극장에서 나는 진짜 작품과 만났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3줄 요약만으로도 전체적인 줄거리가 이해될 정도로 평범한 내용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독특한 것이 있는데,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영화를 찍는 감독의 눈이자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된다. 때문에 보통은 카메라를 주인공의 시선과 나란히 배치시켜 우리가 그에게 더욱더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객은 주인공과 같은 것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느끼고 이윽고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닿게 된다. 그렇기에 카메라의 역할은 단순히 영상을 촬영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그 속에는 감독의 의도가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매의 여름밤>의 카메라는 특정한 의도를 띠고 있지 않았다. 각 인물들의 과거를 비출 수도, 감정을 좇을 수도 있는데, 그저 일어난 상황을 보여줄 뿐 우리에게 일일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래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야 영화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생각들이며, 누구라도 느껴봤을 법한 감정들이었으니까. 캐릭터를 따라다니며 대사로 푸는 설명을 담는 대신, 주변의 소품이나 인물들의 작은 제스처 등으로 우리에게 함축적이면서 또 직관적으로 상황을 전달했다. 만일 이 영화가 작중 여러 사건들을 하나씩 설명했더라도 나는 분명 그들에게 공감했겠지만, 그랬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로 남을 뿐 내게 지금과 같은 울림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곁가지를 정리하듯 영화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오로지 관객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상황 상황에 스스로의 과거를 대입해보지 않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명명백백 해설되지 않고 관객 스스로 생각할 여지가 있었기에, 비로소 나는 이 영화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동안의 불안과 고집은 온데간데없고, 감탄과 존경심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진 영화 철이지만, 올해에 남은 영화들 그리고 내년에 만나게 될 영화들이 더욱 기대된다. 1년 내내 좋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제철을 기다리는 것 또한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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