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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12. 2020

해피 엔딩을 쟁취하다, <콜>

영화 <콜>의 결말이 최고의 해피 엔딩인 이유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해피 엔딩을 꿈꾼다. 치열한 경쟁에 맞서고 고된 인내를 이어가며 또 한 번의 하루를 넘기는 건,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소망이 무색하게도 세상은 해피 엔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특혜가 다른 이의 박탈감으로 이어지는데 어떻게 모두가 웃을 수만 있겠는가. 세상사의 태반은 대립 속에서 결정되기에 결국 누군가는 배드 엔딩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감히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피 엔딩은 쟁취하는 것이다'라고.


일찍이 단편을 통해 두각을 드러냈던 이충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콜>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와 오버스러운 CG, 겉핥기식의 서브플롯 등 상업영화의 고질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오영숙(전종서)'이라는 캐릭터 하나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자칫 동어반복에 그칠 뻔했던 영화 속에서 영숙만이 오롯이 카리스마를 뽐내었다.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이 거의 전종서 배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역대급 여성 빌런', '한국판 조커'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모습들 중, 대체 어느 장면이 그를 빛나게 했던 걸까? 오영숙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장면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이 영화의 엔딩이라고 보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 크레딧이 올라가며 비로소 드러나는 진짜 엔딩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영숙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치이자 다른 사이코패스 영화와의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바로 그 엔딩이 호불호의 중심에 놓여 있지만 말이다. 이번 글에서는 <콜>의 결말에 대한 나의 해석과 그것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영숙의 캐릭터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 속 세 가지 법칙


<콜>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은 우리가 익히 봐왔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가 바뀌며 현재에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은 시간을 다룬 숱한 영화들에서 자주 차용되어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계속해서 미래가 바뀌어버린다면 관객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때문에 보통 이런 이야기들은 자체적인 법칙을 만들어 혼란을 방지하곤 하는데, 주인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곧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기에,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은 한 그는 사건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중심에 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 투 더 퓨처>나 <해피 데스데이>의 주인공들이 그러했고, <콜>의 '김서연(박신혜)' 또한 목격자로서 관객의 시선과 함께 했다. 즉, 영화 속에서 현재가 바뀌어도 서연의 기억은 유지되었으며, 서연의 현재 위치 또한 바뀌지 않았다. 그의 기억과 위치가 관객과 동일시되는 것. 이 두 가지가 각각 <콜>이 지닌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테넷>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대사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계절을 넘어 <콜>에서도 그 효력을 발휘했다. 과거 서연의 집에는 화재가 일어났었고, 이로 인해 그는 아버지를 잃고 다리에는 흉터가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영숙이 화마를 막음으로써, 서연의 현재는 새로이 덧씌워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었다는 양 살아계신 아버지와 상처 하나 없는 다리. 영숙의 도움을 빌려 비극을 회피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숙의 손으로 새로 쓰인 현재는 바로 그 영숙의 손에 의해 원래대로 되돌려졌다. 원인이 바뀌었을 뿐 일어났어야 할 일들은 결국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실이 되돌아갈 때의 연출인데, 사라지는 아버지의 곁에서는 화재를 상기시키듯 불티가 튀었고, 화상의 원인이 달라졌음에도 서연의 다리에는 이전과 같은 곳에 동일한 흉터가 생겨났다. 마치 비극은 막을 수 없음을 설파하는 듯이, 그냥 사라지거나 순간 변해있었던 다른 장면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출을 보였다. 강조된 연출의 사용은 물론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법칙을 전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야기의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


이야기의 주인공은 너무나 명백하게도 서연이다. 주인공에게 적용되는 위의 세 가지 법칙부터, 사건의 원동력이 되는 가족 서사까지. 마치 그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영화 속 수많은 조명들이 서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영숙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서연과 어머니가 재회하는 장면을 끝으로 화면은 암전되며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죽은 줄만 알았던 영숙이 나타나며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결말로 이어졌다. '사족'이라 불리며 호불호의 대상이 된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봤다. <콜>이라는 영화는 영숙이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액자식 구성처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영화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주인공 자신이며, 그렇기에 이야기의 끝은 곧 영화의 끝이 된다. 그러나 <콜>에서는 이야기가 끝나도 영화가 계속되었고, 때문에 나는 어쩌면 이 영화에 서연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화자로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막이 내려진 뒤에도 무대 위에 서있던 인물, 현재의 영숙이 바로 이 이야기의 화자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앞으로의 일들을 경고했고, 그 결과 영화의 결말이 정반대로 뒤집혔다. 해피 엔딩과 배드 엔딩의 주인이 뒤바뀐 것이다.



서연의 이야기 속에서 영숙은 패배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기에. 서연과 어머니가 만나는 건 정해진 미래였기에. 그 속에서 영숙이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숙은 기다렸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서연이 해피 엔딩을 맞으며, 자신의 손에 전화기가 들어올 때까지. 해피 엔딩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전화기야말로 지금 이 순간 누가 주인공인지 나타내는 직관적인 상징이다. 일어날 일들이 다 지나간 지금에 이르러서야 영숙은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행복해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숙에게는 서연의 행복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며 또 그것이 서연에 대한 가장 잔인한 복수가 될 테니까. 분명 영화 속에서 현재가 바뀌어도 서연의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해피 엔딩을 만들어준 뒤에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 영숙의 입장에서 더욱 황홀한 복수가 되지 않았을까? 과거에서 죽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나서지 않고 구태여 해피 엔딩을 기다렸던 영숙의 태도는, 그의 광기와 집착을 몇 배는 더 소름 끼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여 손에 넣은 결말은 분명 영숙에게 있어 최고의 해피 엔딩이었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큼, <콜>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호불호가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영숙이 죽지 않은 평행세계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영숙의 공포스러움을 배가시키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본 것처럼 본편의 후일담 격인 내용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영숙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게 있어서는 다른 어느 장면보다도 마지막 결말이 가장 중요했다. 최후의 최후에 가서 빌런이 움직이며 주인공의 자리와 해피 엔딩까지 쟁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콜>의 신선함이며 영숙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지 않을까.


아마 영화의 해석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의도된 모범답안이 있었다면 영화가 보다 확실하고 자세하게 단서를 밝혔을 테니까. 그러니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든, 영화를 본 뒤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며 즐거움을 이어가는 것이 감독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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