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완성됐는데 왜 개봉을 못하니, 왜 극장을 못가니. 어째 작년은 유난히 경사가 많더니만….
2019년은 그야말로 영화로운 한 해였다. 단순히 개봉작들만 떠올려봐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기생충>, 거기다 <조커>까지. 한 편만으로도 그 해를 이끌어갔을 명작들이 쉴 틈 없이 찾아오니 극장은 언제나 관객들로 가득했다. 영화라는 문화를 통해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합쳐지고, 대중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합쳐지며, 국적과 장르를 떠나 다양한 결실들이 맺혔다. 그런데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었으니,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벅찼던 한 해였을 수밖에. 장담컨대, 2019년은 분명히 영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거였을까. 아니, 2019년의 기쁨 이상으로 2020년의 우울과 좌절은 깊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감염병 '코로나19'로 인해 영화계를 포함한 문화, 정치, 경제… 등 사회의 모든 곳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화의 제작 및 개봉이 연기되었고, 각종 행사들이 취소 혹은 축소되었으며, 극장의 수용 인원과 운영 시간 또한 대폭 감소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일상을 가린 그림자가 여전히 더 짙어져만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반대의 의미로 2020년 또한 영화사에 남지 않을까.
물론 모든 분야가 피해를 입은 것만은 아니다. '언택트'라는 새로운 시대 가치와 함께, 극장에 가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OTT 산업 등은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넷플릭스, 왓챠, 티빙 등 기존 강자들은 당연하고, 2021년에는 벌써부터 '디즈니+의 국내 서비스 시작'과 '워너 브라더스 작품들의 극장 및 HBO 맥스 동시 공개' 등 파격적인 소식들이 기다리고 있어 OTT 업계의 성장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극장에서 안방으로. 스크린에서 모바일로. 영화 소비 스타일의 변화는 이미 예견되어 왔다. 그럼에도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차별화된 가치가 있었기에, 극장은 OTT의 맹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되며 극장에 가지 않는 게 아니라 극장을 갈 수 없게 되어버리면서, 먼 훗날 혹은 그저 가능성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겨왔던 극장의 몰락이 현실로 다가와버렸다. '영화는 극장에서'라고 생각하는 극장주의자인 나에게 있어, 2020년 한 해는 더 큰 아쉬움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서론이 길어졌지만, 그런 올해에도 연말 결산은 계속된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관람작 수가 거의 절반 정도로 적어 해외 영화 베스트 작품을 20편이 아니라 15편만 뽑게 되었다. 깔끔하게 10/10/10으로 맞추자니 아무리 그래도 꼭 간직하고 싶은 영화들이 있어서 조금 애매하지만 15편으로 정리해보았다.
*본 글에서는 해외 작품들만 소개하고, 국내 베스트와 종합 워스트는 길이상 다음 글로 따로 모았습니다.
해외 Best Top 15
Top 15. <엠마>
-자만과 허영, 우월감에 젖어있던 소녀가 무너지며 성장하는 이야기. 솔직히 영국 귀족 느낌 물씬 풍기는 안야 테일러 조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에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Top 14. <디어스킨>
-눈 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것 따위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무언가에 빠져본 적이 있을까. 그런 감정을 극대화한 죽여주는 블랙코미디.
Top 13. <인비저블맨>
-21세기에 걸맞은 새롭고 있을 법한 투명인간 이야기. 판타지 속 '보이지 않는 존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조명하여 공포를 끌어올렸다.
-소위 갑툭튀라 불리는 점프 스케어 없이, 분위기만으로 인생 최대의 공포를 만들어냈다. 진짜 너무 무서웠다. 근데 제일 끔찍했던 건, 미치도록 무서운데도 배우들의 표정과 배경의 디테일이 너무나 예술적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포영화는 죽어도 못 보는 내가 혼자 보러 갔을 정도로, 안야 테일러 조이는 여기서도 예뻤다….
Top 4. <썸머 85>
-어찌 보면 굉장히 뻔한 퀴어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면모는 퀴어보다는 성장이 아닐까. 시작하자마자 결말을 알려주며, 굳이 회상하는 방식의 1인칭을 쓴 것은 이를 더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런들 저런들 노래 'sailing'이 흐르던 그 장면에서의 감정은 가히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Top 3. <교실 안의 야크>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부탄 영화. 영화 시간이 더 길었으면, 그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으면 했다. 결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힐링 영화가 아니다. 결말부터 메시지까지, 힐링과 함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영화의 배경인 루나나가 이상향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행복이, 배울 것이 가득했다.
Top 2. <조조 래빗>
-광기를 조장하는 사람들, 광기에 빠져버린 사람들, 광기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함께 광기에 묻히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고 했더라도 분명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대사 하나하나가 기발하고 재치 넘쳤던, 그야말로 와이티티 스타일의 영화였다.
Top 1. <사랑이 뭘까>
-정말 사랑이 뭘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누군가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저 '좋지 않은', '나쁜' 사랑이 있을 뿐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은 쉽게 내뱉을 수 없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참으로 답답하거나 참으로 불쾌하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정도로 그들의 사랑은 지금까지의 로맨스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두 그들 나름의 사랑이었다. 문득 납득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이기적인 그 사랑을 바로 나도 했었다는 것을. 내가 테루코에 가까운 인간이라 일종의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정확히는 테루코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나카하라였던 사람이려나.
여하튼 나는 이 영화를 1위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임팩트나 완성도 면에서는 작년에 개봉했던 <아사코>에 비하지 못했지만, 캐릭터들의 감정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고 너무나도 나와 같았기에. 아사코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면, 테루코는 이해를 넘어 격하게 공감되는 인물이었다.
연말 다시 코로나19 확산이 심해지며, 예매해 놓았던 영화들도 취소하고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올해는 작년에 비해 극장에 다닌 횟수가 줄었다 보니, 보고 싶었으나 관람을 놓쳐버린 작품들도 은근히 있었습니다. 영화 연말 결산 순위는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며, 제가 보지 않은 영화들 그리고 순위권에 없는 영화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코로나19 조심하시고, 새해에는 부디 영화로운 일상이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