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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pr 07. 2021

우리가 그것을 타락이라 부른다면, <항생제>

미래에 대한 지독하게 불편한 상상도

떨어질 타(墮)에 떨어질 락(落). 말하자면 타락이란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드높은 이상과는 정반대의, 금기시되는 영역으로의 추락이다. 불법적이거나 비인도적인 일,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 타락은 그러한 것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회는 그것을 악으로 규정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욕망보다는 이성과 윤리를 따르도록 배워왔다. 세상 그 어떤 교과서나 경전도 자유로이 타락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겹겹의 페이지에는 절제하고 인내하여 정진하라는 구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것이 정녕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욕망을 다스리고 고통을 감내하면 바보가 되는 게 우리네 세상이지 않은가. 투자하고 거래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공식이다. 쓰지 않고 누리지 않으면 제자리에 정체될 뿐이다. 욕망이야말로 인간 사회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 중 하나인데, 그것을 부정한다니. 발걸음을 돌려 도태의 길로 들어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입고 싶은 옷은 사 입으면 되고, 먹고 싶은 음식은 사 먹으면 되며, 가고 싶은 곳에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어느 정도의 욕망은 어느 정도의 돈으로 충족되니까. 그것이 가능한, 참으로 가볍고도 무거운 세상이다. 우리는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돈이라는 녀석이 너무나도 쉽게 우리의 앞에 소망을 끌어다 주니까. 그것이 간단하기에 쉽게 익숙해지고, 익숙해지기에 조금씩 당연해진다. 우리는 자연히 욕망하며, 이윽고 자연히 타락해간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 초등학교, 아니 더 이전부터 우리는 예쁘고 올바른 것들에 대해 배워왔다.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과목들. 필독 도서에 권장 도서라며 읽게 했던 책들. 그런데 도대체 그런 것들을 가르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학교를 나서고 집을 나서면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펼쳐져있거늘. 우리를 착한 바보로 만들고자 했던 걸까. 잘못되었다고 배워온 것들이 당연시되는 현실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의 가치는 단순한 화폐 그 이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세상 만물에 가격표를 붙여 거래하고자 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경시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상과는 다른 일그러진 세상이다. 분명 누군가의 눈에는 타락한 세상으로 보일 테지. 그래, 차라리 타락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그저 모든 걸 바꾸는 것으로 문제가 해소되었을 텐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은 타락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며 그에 따른 필연적 부산물들이 병폐로서 드러났을 뿐, 세상은 여전히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본의 축적이라는 이상. 의식주의 해결을 넘어선 다양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돈의 주인이 되었고 또 노예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에게 욕망을 이룰 수단을 제시했고, 우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 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의 순리가 아닌가. 다소 과장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타락이라 부르는 것들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바라보는 이상인 것이다.



연예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집단 환각이에요.


영화 <항생제> 속 세상은 어딘가 기이하고 조금은 불편했다. 어느 곳을 가든 TV에서는 연예인의 소식만이 반복되었고, 홀린 듯 맹목적인 사람들의 눈빛이 화면 앞을 가득 메웠다. 유명인을 향한 동경이야 현실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았기에, 한편으로는 영화 속 풍경에 익숙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도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작을 찾아보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 묘사된 연예인과 팬의 관계는 현실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서로 감사하며 유대를 쌓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소비하는 상품과 구매자의 관계. 저들에게 연예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대중의 만족을 위해 착취되는 상품에 불과했다.


동경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커져가는 마음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게 되면 ―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신이든 우상이든 ―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되고 싶어 지는 때가 오곤 한다. 자꾸만 궁금해지고, 더 알고만 싶고, 무엇이든 공유해서 공감하고 싶어 진다. 쫓아가기 위해서, 닮아가기 위해서. '하나되다'라는 말처럼, 그 사람과 동일시되고자 한다. 연예인이 착용한 옷이나 가방이 품절되는 것도, 연예인이 다녀간 식당이 맛집이 되는 것도,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일상 속의 연예인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도 모두 그들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이건 그냥 근육 세포잖아.
사람 자체를 썰어서 먹는 게 아니니 뭐.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걸까.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같은 식당의 음식을 먹으면 하나가 되는 걸까? 그것만으로 과연,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렇지 않으리라 보았다. 보다 더 직접적이며 물질적인 방향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욕망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리고 <항생제>는 그러한 가능성이 실제가 된 하나의 예시를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에서 연예인들은 기업과 계약하여 정기적으로 세포를 제공했다. 그 세포에 기생하던 바이러스는 따로 추출되어 상품이 됐고, 건강한 근육 세포는 배양되어 고기로 만들어졌다. 연예인의 몸에서 고객의 몸으로. 연예인의 세포에서 고객의 세포로. 단순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정도를 넘어,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어 몸의 일부로 삼는 것. 그것으로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다 믿는 세상이었다.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구역질이 나오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상품들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충성도 높은 팬들은 줄을 서서 번호표를 뽑기 바빴고, 기업들은 수요에 맞춰 상품을 공급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자본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스스로가 타락해버린 것도 모른 체 말이다.



영화의 설정과 흐름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극치였으며, 우리 사회가 도달할 골인지점과 같았다. 그렇게 되리라는 영화의 경고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우리는 법과 윤리의 테두리 안에 있기에, 영화와 같은 비즈니스가 양지로 올라올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젠가 사회의 인식이 바뀌고 법률이 개정되는 날이 온다면, 이제껏 금기시되어왔던 더 자극적인 상품들이 출시된다면. 과연 그때에도 우리는 어디까지고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저 주어지는 대로 소비를 계속하다가는 분명 자연히 타락하고 말 것이다.


바이러스를 자기 몸에 투여하고 인간의 배양육을 먹던 그들은 인면수심의 악마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시간이 흘러 가치 기준이 달라진다면,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배양육에 익숙해진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실제 인육을 사고파는 세상이 오지 않으리라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이미 누군가의 흔적을 사고팔고 있는 세상에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불편했다. 화가 나거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과는 다른, 피할 수 없는 쓰라림이 닥쳐오는 기분이었다. 미래의 내가 화면에서 튀어나와 마구잡이로 손톱을 들이미는 것만 같았다. 떨어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눈을 감을 것인지. 그것을 타락이라 부르면서도 받아들일 것인지. 영화는 그저 지긋하게 세상을 보여주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에게 질문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세상과 병적으로 새하얀 배경, 징그럽고 기괴한 환각들. 영화는 철저하게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인물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게끔, 그들의 행동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끔 자꾸만 우리를 영화 밖으로 밀어냈다. 공상 영화의 관객이 아닌 현실 사회의 당사자로서 우리의 미래를 지켜보게끔 했다.


결국 연예인의 세포를 넘어 그 시체까지도 상품화하는 결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던 걸까. 더없을 정도로 추락해버린 사람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던 게 아닐까. 만일 우리가 그것을 타락이라 부른다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그 사회의 도래를 막기 위해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타락하는 것이 이상인 세상에서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배워온 이유는, 바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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