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Mar 12. 2021

세상에 기적은 없더라도, <117편의 러브레터>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맺힌 희망의 과실

세상에 기적은 없네.
사랑으로 뭐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삼류 소설에서나 가능하죠.


내게는 소위 믿음이라는 것이 없다. 신도, 운명도, 그 아름다운 기적의 순간마저도. 적어도 내가 보는 세상 속에서 그러한 것들은 그저 공상일 뿐이다. TV 속 누군가는 기적을 마주했다고 하는데, 왜인지 우리 가족에게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 그저 조금만 더 편안하고 평범한 일상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눈앞에 우뚝 선 장벽들을 스스로의 손과 발로 기어오를 때까지, 기적이라 부를 일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 소망이 이루어진다니, 그것은 요행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때문에 내게 있어 기적을 기다린다는 것은 하루 종일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과 대동소이한 일이다. 물론 세상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 삶, 내가 느끼는 매 순간순간이 일종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기적이 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다. 기적이라는 막연한 단어로 설명해버리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치열하니까. 매일매일의 노력은 저 하늘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비롯된 거니까. 말하자면 기적이란 결국 노력의 산물이다. 기적이 일어났기에 어떻게 된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기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기적이란 간절히 기도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루어낼 수 있는 작은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의 주인공 '미클로시(밀란 쉬러프)'는 폐질환으로 인해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기침에 각혈은 물론이며 매 새벽마다 끓어오르는 고열에 시달렸을 정도로 그의 몸은 위태로웠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났는데. 인생을 만끽할 틈도 없이, 그의 삶에는 어느새 종지부가 찍혀 있었다. 의사의 허가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하나 둘 쓰러져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뿐인 병원에서의 생활은,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인 수용소의 나날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한 명을 정할 겁니다.
제가 사랑할 사람을요.


그러나 미클로시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어떤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음에도, 결코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다. 죽음이 눈앞을 막아선 그 순간에 그는 반대로 생명의 불꽃을 피워냈다. 그는 사랑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결심은 곧바로 실천으로 옮겨졌다. 그는 자신과 같이 병원에서 요양 중인 헝가리 여인 117명에게 한 장 한 장 손편지를 적어 보냈고, 돌아온 답장들 중 '릴리(에모크 피티)'라는 소녀와 6개월간 필담을 이어갔다. 문장을 통해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그들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고, 반드시 일어날 기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건강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나을 겁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순탄치 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진전 없는 병세와 주변인들의 만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물리칠 방도가 없는 병마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이 글의 가장 위에 적힌 의사들의 대사는, 차갑고 매정하게 들리면서도 그들의 안타까움과 자조가 깊게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미클로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을 멈추기는커녕 병원을 탈출하면서까지 그는 릴리와 함께 하고자 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시한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누구보다 죽음과 맞닿아있던 그는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밝게 미래를 이야기했다. 남은 시간이 없다며 삶을 정리하라는 의사의 조언에도, 그는 편지를 적고 인연을 맺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미클로시와 릴리의 결혼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끝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었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미클로시가 그 후로 무려 52년이나 릴리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분명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살고자 하는 의지로 계속해서 몸과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겠지.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로 생명의 불꽃을 키워 나갔기에, 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페이지를 늘려갈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여전히 나는 이 영화를 기적에 대한 이야기라 부르지 못하겠다. 폐병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했던 노력들,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 그가 키워온 사랑을 목격했기에. 나는 이리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스스로 기적을 맺히게 했다고. 이 영화는 분명 사랑의 위대함과 그것이 불러온 기적에 대한 이야기일 테다. 하지만 내게는 포기하지 말라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결실이 맺힐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 내내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미클로시의 노력은, 세상에 기적은 없더라도 기적 같은 순간을 일구어낼 수는 있음을 시사했던 게 아닐까.




※ 개봉 전 배급사 알토미디어어㈜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를 통해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으로 이기적인 나였구나, <미나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