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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r 07. 2021

참으로 이기적인 나였구나, <미나리>

당연해서 더 특별한 미나리 가족의 힘

무어라 시작을 하면 좋을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상영관에 불이 켜질 때까지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대체 이 영화의 어느 곳에 그렇게 울컥했는지, 어떤 점에 그리도 마음이 흔들렸는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들이 언어를 이루지 못한 채 눈물샘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던 이 영화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자 했으며, 또 무엇을 찾았던 걸까.


생각을 곱씹고 대화를 이어가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 장면이 어땠고, 저 장면은 어땠고. 아무 말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는 쉼 없이 얘기하고 싶었다. 맴돌던 감정 모두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제야 알겠더라.

나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다 좋았구나.


여느 영화에서 볼 법한 특이한 설정도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이민, 토네이도, 농사. 2021년 대한민국의 우리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들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족이었다. 실패에 부딪히고 불안과 마주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 비록 걱정의 대상은 다를지언정, 이것 만큼은 어느 시대 어느 가정에서나 모두 같은 마음인 게 아닐까. 시간과 공간의 차이 이상으로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에게 공감했기에, 그들의 모습에 나와 우리 가족이 겹쳐져 보였기에. 어느샌가 그들과 달라져버린 지금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오는 첫 장면에서부터 엄마 '모니카(한예리)'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은 부딪혔다. 이민 가정의 가장이라는 책임감과 절박함에 몰려 이상만을 좇게 된 아버지와, 보다 더 현실적인 시선으로 지금의 가족과 앞으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돈이 곧 구원이 되는 세상에서 이들의 대립은 그저 예사로운 일이었다. 불쑥 찾아오는 토네이도 하나에 몸을 떠는 바퀴 달린 집처럼, 그들의 삶은 아슬아슬 유지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자며, 힘이 되어주자며 나누었던 약속만이 그들을 겨우 가족으로 붙잡아두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약속 하나만을 믿고 견디기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계속해서 불어날 뿐인 걱정들에 과거를 추억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함께 부르던 사랑 노래조차, 그들에게 닿지 못한 채 텅 빈 밤거리를 맴돌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경사들에도 불구하고, 쌓이고 쌓여온 감정들은 결국 주차장 한편에서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이제 다 잘 되었다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사소한 일로도 부딪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가 정리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영화는 '미나리 가족'의 이야기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분명 잠깐의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하니까. 그렇다고 불안만을 남긴 채 끝낼 수도 없었겠지. 그것만이 현실인 것은 결코 아니니까. 그래서 영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뒤따랐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 계속될 것이었기에.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창고를 집어삼킨 화마였다. 가족을 위해, 그 가족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키워온 농작물들이, 겨우 남은 마지막 희망이 불길에 삼켜지고 있었다.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가 있을까. 미나리 가족이 이사 오기 전 그 집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단 몇 개의 희망이라도 구해내고자 제이콥은 불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를 구하기 위해 모니카 역시 몸을 던졌다.


불꽃이 튀고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와중에도 그들은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연기에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연신 기침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지영 엄마'나 '지영 아빠'도, '모니카'나 '제이콥'도 아닌 그 부름에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여보!

결혼하면서 나누었던 서로를 구해주자는 약속. 잊지 않았던 그 약속대로 두 사람은 불길 속에서 다름 아닌 서로를 찾고 서로를 구해냈다. 치솟는 불길과 상반되던 아름다운 음악은 미나리 가족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희망으로 이어질 것을 시사하던 게 아니었을까.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창고를 지나 영화는 화면 가득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비췄다. 한복을 차려입은 제이콥과 모니카의 결혼사진, 신혼여행에서의 사진, 미국에 정착해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이러니하게도 <미나리>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이 벽에 걸려 있지 않았다. 어쩌면 어딘가 놓여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초반부터 계속 언급만 될 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데에는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부부가 서로를 구하며 앞으로 나아간 후에야, 액자는 드디어 클로즈업됐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 내가 이 영화 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 가족사진이 아니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진 한 장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진을 꺼내어볼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지만, 어느새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솔직하게 감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추억을 함께하는, 그런 당연한 일들이 언제부턴가 내 삶에서 줄어들어 갔다.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내 자존심에, 내 기분에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나였구나.


미나리에는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자꾸만 일렁거린다. 그리도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이제껏 그토록 많은 후회를 남기며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여유가 없어진, 이기적이 되어버린 지금의 내게 이 영화 속 가족은 한 떨기 미나리와 같았다. 당연한 걸 당연히 행할 수 있는 그들의 평범함이 내게는 무엇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마음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이 없어질 때에는, 나도 당신도, 자그마한 가족사진을 꺼내 그 속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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