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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Feb 12. 2021

세상의 모든 '비정상'들에게, <아이>

걱정보다 희망을 담은 따스한 영화

어두운 화면에 시끄러운 소음만이 울렸다. 덜컹덜컹 쿵쿵. 많이 듣던 소리였는데,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덜컹덜컹 쾅쾅. 좁디좁은 베란다의 끝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오래된 통돌이. 소음의 범인은 너였구나. 이윽고 달려온 '아영(김향기)'의 손에는 장판 쪼가리가 몇 장인가 들려있었고, 그것들을 세탁기 아래에 끼워 넣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고요해졌다. 영화가 시작하고 1분이나 지났을까? 한때는 일상이었던 그 모습에, 나는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에 빠져버렸다. 왠지 이 영화 속에도 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의 주인공 아영은 보호시설을 나온 지 얼마 안 된 보호 종료 아동이다. 남들보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그에게 세상은 가혹하기만 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착실히 그리고 악착같이 노력했지만, 그렇게 노력하여 수입이 늘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일 수밖에. 하지만 아영도 우리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법은 그 사람의 생활이 아니라, 그것이 기록된 서류 단 몇 장만으로 삶을 평가하고 재단하니까. 그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필요했던 아영은 베이비시터 일을 소개받았고, 그렇게 생후 6개월 된 아기 '혁'이와 그의 엄마 '영채(류현경)'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영채는 빈말로도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빚에 쫓기며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서툴렀던, 아이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혁이는 영채의 관심 밖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영이가 대신 쓴 육아일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며, 아이를 앞에 두고 빚쟁이와 몸싸움을 벌였고, 유모차는 베란다에 모셔놓은 채 묵혀두고만 있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 이것저것 다 해본 끝에 결국 지금의 상황에 매달리게 됐을 테지.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나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러나 영채가 좋은 엄마가 아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한들, 그는 분명히 한 번 혁이를 포기했었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의 영채는 영락없이 철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그래, 분명 영채도 아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서툴렀던 거겠지. 여유가 없었던 거겠지. 그러나 나는 그 여유야말로 아이의 보호자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유가 사라진 빈자리에는 불안만이 가득 채워지는 법이니 말이다.



<아이>를 보며,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어느 가족>.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전자의 아이 '무니'는 엄마와 함께 모텔방을 빌려 살며 갖은 범죄와 욕설에 노출되어 있었고, 후자의 아이 '쇼타'네 가족은 도둑질로 생활을 이어갔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기에. 진심으로 아이를 아꼈고 사랑했지만, 그들은 결국 나쁜 가족이며 가짜 가족이었다. 법 앞에서 그들은 그저 비정상일 뿐이었다.


두 영화의 끝은 같았다. 비정상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해 위탁가정으로 보내는 것. 실로 현실적이며 또 분명 옳은 일이었겠지만, 과연 그것은 좋은 일이었을까. 무어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그 아이는 그 가족을 원했을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무조건적이고 강제적인 공권력의 판단에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대체 정상이 뭐길래. 영화 <아이> 속의 대사처럼, 중소기업 사장인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가 아니라면 아이와 함께해선 안 되는 걸까.



가족이 해체되며 끝난 두 영화와 달리, <아이>의 마지막은 새로운 가족의 형성을 비추었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듯이, 앞으로의 삶 그리고 아이의 삶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들이닥칠 것이다. 사회의 시선, 법의 관점에서 그들은 결코 '정상 가족'이 아니었기에. 손가락질과 눈총은 물론, 어쩌면 더욱 큰 비극에 다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아이에게 있어 좋은 선택이었을까? 앞선 영화들처럼 적어도 옳은 선택을 해야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영과 영채의 길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끌어안은 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저물어가면서도 밝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 서로를 마주하며 가족으로서 발을 내딛는 모습. 그러나 그 뒷모습이 마냥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다. 양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유흥가의 간판들. 가족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배경의 괴리가 마치 그들을 막아설 현실의 벽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어느 가족>과는 정반대의 결과였지만, 이 영화의 결말 역시 가슴속에 응어리를 남겼다. 불안했고 찝찝했다. 그저 아름답게 보일 뿐이었는데. 어차피 빤히 보이는 미래였는데. 영화는 안락한 방이나 평화로운 공원 대신, 구태여 마지막 배경을 유흥가로 하여 스크린 속 세상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쭉 아름답게 끝낼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였을까? 그것은 분명 이 영화가 동화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현실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해피엔딩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영화는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어려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힘을 주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혹시', 라는 자그마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나 보다. 어른 같았던 아이와 아이 같았던 어른은 모두 진짜 어른이 되었다. 다른 이의 손을 끝까지 잡아줄 수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수 있고,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아영도 영채도 어느샌가 어른이 되어 있었기에, 나도 그들을 믿고 싶어 졌던 게 아니었을까.



영화 초반 아영은 떼쓰는 아이에 대한 교수님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야 한다고 답했었다. 자신이 버려졌었기에, 그 삶을 살아왔었기에 할 수 있는 답이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버려지는 아이들을 목격하고 스스로도 그 말에 또다시 버려지면서, 아영의 생각은 바뀌었다. 버려지는 아픔을 알기에, 비정상이라 불리는 고통을 알기에. 다른 이를 버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며 품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세상에 어려움 하나 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저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정상의 모범답안 같은 가족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가 다르기에, 정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비정상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 만나 희망을 일궈냈듯이, 우리도 서로를 믿어본다면. 따스한 손을 내밀지는 못하더라도 차가운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거둔다면. 그저 법대로 그들을 정상화시키는 대신, 모른 척 방치하며 지나치는 대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봐 줄 수 있다면. 분명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 없이 모든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아이>는 우리들, 세상의 모든 비정상들에게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전했다.




이 영화에 아쉬움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아이>는 분명 좋은 영화다.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따스한 영화다. 김향기 마크 인증 좋은 영화다. 또 어떤 영화로 우리를 비춰줄까. 김향기 배우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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