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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an 31. 2021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은 사람들>

행복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따스한 영화

산 사람은 살아야지.


누군가를 떠나보낸 자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일 테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슬퍼한들 바꿀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슬픔에 잠기기보다는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게 당연하다. 나 역시 이 말의 취지에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저 말을 건넨다면, 나는 한 가지 그에게 이렇게 되묻지 않을까. "왜요?"라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막연한 생존본능이다.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자고, 살기 위해 일하고.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서 살 뿐인 삶에 과연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고 싶었다. 내가 살아야 하는, 내가 살아도 되는 뚜렷한 이유를 누군가 내게 가르쳐주었으면 했다.


쓸데없는 생각. 나쁜 생각. 이상한 아이. 어릴 적부터 죽음에 집착해왔던 비뚤어진 나였기에, 누구로부터도 답을 얻지 못한 채 계속해서 깊이 더 깊이 죽음 속으로 빠져들어만 갔다. 어쩌면 나는 절박했을지도 모른다. 어서 빨리 답을 찾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덕분이었을까, 너무나 친숙한 영화 속 이야기에서 나는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 나보다 더한 슬픔을 겪은 인물들이 삶의 의지를 다잡는 장면을 보며, 나는 비로소 하나의 답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남았다고.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의 주인공 '알도(카롤리 하이덕)'와 '클라라(아비겔 소크)'는 제목 그대로 홀로코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았음에도, 아니 살아남았기에, 그들에게서는 웃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너무나도 큰 상실감. 아내와 자식, 부모님과 동생을 잃은 그들의 삶은 점점 무기질적으로 되어갔다.


커다란 슬픔을 겪은 사람은 곧잘 스스로를 행복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이 슬픔 속에서 자신만이 행복해지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떠나간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알도와 클라라도 그랬다. 다른 이와의 교류 없이 그저 직장과 집을 오가며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냉소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살았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배를 채우기 위해 먹었고, 목적이 없음에도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남아왔다. 어째서였을까? 식음전폐까지 할 정도로 슬프지는 않았어서? 어쩌면 그들의 생존본능이 유난히 강했어서? 아니,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서로와 만나기 위해 살아남았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 상대방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 살아왔던 게 아닐까. 클라라에게는 알도가, 알도에게는 클라라가.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두 사람은 가족이 되었다.


두 명의 주인공들이 피워낸 연대의 불꽃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품을 정도로 따스했다. 서로를 만나 아픔을 공유하며 알도와 클라라는 점차 변해갔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거나 사교 모임에 출석하는 등 이전보다 더 활동적이고 밝은 모습이 되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면서, 그들은 이제 또 다른 살아남은 자들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 속 그들처럼 지금의 우리도 세상을 뒤덮은 위협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고 있다. 언젠가 이 재앙이 지나갈 것이라 믿으며, 언젠가 마음껏 행복을 피울 수 있기를 꿈꾸며. 우리도 매일매일을 살아남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 밤에도 아침은 찾아올 테고, 새로이 시작되는 하루에서 또다시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겠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묵묵히 살다 보면 반드시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확답은 내릴 수 없다.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사랑 이야기는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한없이 막연할 뿐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화 속의 기적을 그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아픔이 치유되고 일상이 돌아오는 과정을 비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도 꿈을 꿀 수 있도록. 살아가기 위한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알도와 클라라처럼 살아남은 사람들과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세상을 감싸는 연대에 분명 우리도 그들도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만일 당신이 지금 지쳐있다면, 슬픔에 빠져있다면. 이 영화 속에서 따스함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 개봉 전 배급사 알토미디어어㈜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를 통해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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