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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pr 20. 2021

살기 위해 우린 죽어야만 했기에, <어른들은 몰라요>

안타깝도록 처절했던 우리들의 성장담

"아프니까 청춘이다." 한때는 조롱했던 이 말에 언제부턴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래. 아픔에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아픔에 맞서 정의감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 당당하며 도전적인 그들이야말로 청춘이라 불릴 수 있는 거겠지. 언제나 더 높은 이상을 꿈꾸기에, 그들은 현실에 아파하고 현실과 갈등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다. 마치 어린 날의 우리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너무나 큰 아픔에, 혹은 너무나 많은 아픔에 이제는 목소리를 낼 여력조차 없어진다면. 그저 현실과 타협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면. 분명 푸르렀던 봄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청춘일 수 없다. 나의 아픔도 남의 아픔도 다 모르는 척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도 묵묵히 감정을 죽여나가는 우리 어른들처럼 말이다.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는 주인공 세진(이유미)이 손목을 긋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아픔을 모르는 기계와 같이 피딱지 사이 빈 공간을 커터 칼로 횡단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당혹감에, 반가움에, 안타까움에. 자그마한 감정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던 메마른 모습에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저 아이에게도 자해는 그저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던 거겠지. 아파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야 살아있을 수 있고, 그래야 계속해서 꿈꿀 수 있었을 테니까. 져버리려는 봄을 붙잡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또 하나의 상처를 새겼다.


포스터에서도 그렇듯이, 세진은 언제나 롱보드와 함께 했다. 손에 들고, 등에 메고, 발로 밀면서, 보드를 타지 않을 때조차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숨거나 도망치는 데에는 방해됐고, 담장을 넘을 때에도 짐이 되었지만, 자기 키만 한 롱보드를 항상 끌어안고 다녔다. 놓치고 떨어트리면 저 멀리 굴러갈 것만 같았을까. 바퀴 달린 몸체는 언제라도 그에게서 멀어질 듯 아슬해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무심한 듯하면서도 세진의 시선은 줄곧 보드에 닿아 있었다. 대체 그 보드가 뭐길래. 그에게 있어 보드란 무엇이었던 걸까.


영화 내내 세진의 자해 뒤에는 곧바로 롱보드 신(scene)이 이어졌다. 그가 직접 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의 롱보딩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마치 환상과도 같았던 그 장면 속에서 세진의 두 눈은 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상상하던 내 모습도 그랬을까. 무엇이든 될 수 있던 시절의 내 눈빛도 그렇게 반짝였을까. 자해로 인한 고통 속에서, 세진은 꿈을 꾸고 있던 것이다. 춤을 추듯 보드를 타던 그 소녀야말로 세진의 꿈이고 이상이었다. 되고 싶은 미래의 자신이었다. 세진에게 자해가 꿈을 꾸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보드는 현실에 딱 하나 남은 꿈의 조각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자꾸만 멀어져 갔고, 그래서 더 곁에 두고자 했던 거겠지.



무책임한 어른들, 여유가 없는 어른들에 치여 세진은 거리로 향했다. 무엇을 하려든 스스로 해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사회로 나설 준비가 아직 덜 되었음에도 돈을 벌려면 학교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나왔다 한들 세진에게 과연 돈벌이의 수단이 있었을까? 양지에서 길을 찾지 못한 자들은 결국 음지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고통스러울 내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속으로 스스로를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그런 아저씨들 있음
우리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데.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어쩌면 세진은 이 불편한 현실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학생'이고 '아이'였던 시절부터 이미 보호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었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그저 버티고 받아들이며 감정을 죽여야만 했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어른들은 누구 한 명 세진을 아이로 대하지 않았으니, 그는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고통에 익숙해지고 점점 무뎌졌기에, 세진은 자신에게 뻗쳐오는 마수조차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게 아니었을까. 어쩔 수가 없음을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세진을 구하고 도와주려 했던 건 같은 처지의 또래들 뿐이었다. 골목 생활 선배인 동갑내기 주영(안희연)과 이제 막 어른이 된 스무 살의 재필(이환) 일행. 세진이 마주하게 될 세상의 잔혹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았고, 그 아픔만은 겪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우려는 자들에게는 힘이 없었고, 힘 있는 자들은 도우려 하지를 않았다. 아무리 애를 쓴들 아이는 어른에게, 그리고 어른은 더 큰 어른에게 굴복하고 착취당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였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진은 조금씩 지쳐갔다. 어른이 되어 가던 마음속에 아직 아이가 남아있었으니까. 구태여 가장했던 천진함 뒤에서 유약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어떤 마수에도 흔들리지 않던 세진이었지만, 의지했던 사람들의 배신에는 그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커다란 배신을 겪은 뒤, 불신에 빠짐과 동시에 이전보다 더욱더 믿음을 갈구하게 된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날 잡아주지 않으면, 내가 스러져버릴 것만 같으니까. 세진 또한 그랬을 것이다.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었겠지. 아니 어쩌면, 설령 또다시 배신당한다 하더라도 당장에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 세진은 환상 속의 소녀처럼 보드를 타고 강변을 달렸다. 현실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게 된 거였을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기쁨도, 보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표정 없는 얼굴 위에는 씁쓸함만이 묻어있었다. 곧이어 세진은 보드에서 내려 홀로 강변을 걸어 나갔고, 주인 잃은 보드만이 화면 너머 그곳에 남겨졌다. 그토록 붙잡고 있었던 꿈을 끝끝내 내려놓은 것이다. 거듭되는 배신으로 추락한 끝에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 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그 역시 살아가야만 했으니까.


살기 위해 우린 죽어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꿈을 꾸지 않게 되었고, 우리의 감정은 서서히 죽어갔다. 분명 그게 어른이 된다는 것이겠지. 희미하게 느껴지던 감정들에도 딱지가 앉아 모두 감춰지고 말겠지. 세진의 뒤로 흐르던 경쾌한 음악과 깨끗한 하늘이 참으로도 야속했다. 마치 그의 앞날을 포장이라도 하려는 듯, 안타깝도록 처절했던 나날들에 '성장통'이라는 훈장을 붙이려는 듯.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세진의 모습이 한없이도 안쓰럽고 먹먹했다.




영화는 인물의 행동이나 심리를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건의 과정과 결과를 비춤으로써 관객 스스로가 각자의 경험에 맞추어 그들을 이해하게끔 했다. 그들의 아픔을 직시하고, 우리의 아픔을 꺼내보도록. 아이들의 선택을 나무라거나 안타까워하기 전에,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이 세상을 돌아보도록.


한 편의 영화 정도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우리가 생각을 곱씹고 머리를 맞댄다면, 자그마한 불씨가 피어나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어른들은 몰라요>는 불편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건 결코 불쾌감 따위가 아니라, 언젠가 이 겨울이 지나고 푸르른 봄날이 돌아오리라는 믿음이었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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