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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07. 2021

우리의 여정이 계속되듯이, <비커밍 아스트리드>

자유롭게 꿈꾸며 성장하는 삐삐처럼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저는 이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성장에는 끝이 있다는 듯이. 어느 순간 당신이 무언가가 되고, 그걸로 끝나버린다는 듯이 말이죠. 저의 여정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 길에 정해진 종착지는 없어요. 그렇기에 저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고요.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해나감을, 우리 모두가 알았으면 해요.

I think it’s one of the most useless questions an adult can ask a child — What do you want to be when you grow up? As if growing up is finite. As if at some point you become something, and that’s the end. My journey is the journey of always continually evolving, that there is never a point where you arrive at a thing. So I'm still becoming, and I hope all of us know that we are constantly evolving.

- 미셸 오바마


<비커밍 아스트리드>라는 제목을 처음 들은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영단어 '비커밍(Becoming)'에 빠지고 말았다. 아스트리드가 대체 누구인지, 영화의 내용은 또 어떤 것인지. 그러한 것들도 물론 궁금했지만, 우선은 저 비커밍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할 것 같았다. 'ing'가 붙은 저 아이는 과연 현재분사일까 아니면 동명사일까. 왜 비케임이 아니라 비커밍인 걸까. 평소라면 생각조차 안 했을 이상한 의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미국의 제46대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는 자서전의 제목을 왜 《비커밍》으로 했냐는 질문에 위와 같이 답했다. 우리의 성장에는 한계도 정답도 없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되어 나아가며, 그 모든 과정이 곧 우리의 삶이 되는 거라고. 그는 우리가 스스로의 가능성과 마주하기를 바랐다. 여러 이유로 점점 놓아가는 꿈들을 붙잡길 바랐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 고민이 한순간 뒤집어지더라. 그래,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다. 현재분사든 동명사든, 비커밍이 가리키는 '아스트리드'라는 주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그제야 난 아스트리드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영화는 아스트리드(알바 어거스트)가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지기 이전, 아직은 어린 나이였던 시절로 돌아갔다. 1920년대 스웨덴 시골 소녀의 하루란 동생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돕는 게 전부였다. 아직은 차별과 편견이 만연해있던 사회, 종교적 가치가 무엇보다 중시되었던 작은 사회였기에, 아스트리드의 삶에는 언제나 제약이 따라붙었다. 해가 저물면 집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머리 모양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따르기에 당연하고 평범했던 그것이 그 시대의 인습이었다.


아스트리드는 바른 아이였다. 주일에는 가족을 따라 교회에 나갔고, 동생들의 어리광에도 불평 한 마디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았다. 부당한 차별에는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내었으며, 갖은 억압 속에서도 상상하기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파트너 없이도 사교회에서 자유롭게 춤을 췄고, 조신함의 상징인 양갈래 머리도 싹둑 잘라내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경 말씀에 '소다와 굿모닝'이라 화답하던 아스트리드의 모습은 순수하고 재치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



뛰어난 글솜씨로 지역 신문사의 인턴이 되었던 아스트리드는 그곳에서 삶의 거대한 전환점과 맞닥뜨렸다. 부인과 별거 중이던 편집장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된 것. 당황스럽고 겁이 났을 테지. 예기치 못한 임신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분명 아스트리드 본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고 있을 틈도 없이 주변의 시선들은 자꾸만 그를 양갈래 길 앞으로 밀어붙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편집장과 결혼하여 그의 아내로 살거나, 아이를 포기하고 새로이 시작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사회에서, 아스트리드에게는 이 두 가지 선택지만이 강요되었다.


무책임한 인습이었다. 사회적 지위, 종교적 가치 등을 우선해 누군가의 삶에 제동을 걸어버리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꿈을 꾸고 또 누구보다 노력했던 아스트리드였기에, 그는 양자택일의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도, 태어날 아이의 삶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 스톡홀름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이 되기 위해. 그러한 꿈이 있었기에, 미혼모라는 편견과 그에 따른 어려움 속에서도 아스트리드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할 수 있었다.



아스트리드는 매 순간 그 누구도 아닌 아스트리드 자신이었다. 그저 세상이 정한 틀에 스스로를 맞춰버린 마을의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성장해나가는 특별한 존재였다. 신문사에 들어가고, 아이를 낳고, 비서 일을 시작하고. 영화 내내 그는 언제나 멈추지 않고 노력했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자신이 되어 갔다. 시골의 작은 신문사 인턴에서부터 수도권 회사의 비서, 나아가 세계적인 아동문학 작가로. 영화는 그가 본격적인 작가가 되기 전 아들 라세와 만나 가족이 되는 순간까지 만을 담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의 여정이 머지않아 《말괄량이 삐삐》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란 것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노년의 아스트리드는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보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 어쩜 그렇게 아이들 마음을 잘 아시냐는 말. 그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그릴 수 있었던 건, 멈춰 서지 않고 끝없이 마음을 키워온 덕분이 아니었을까. 삶의 마지막이자 성장의 끝이라 여겨지는 노년에서조차 그는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남기며 이어져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눈앞의 고난에 압도되어 꿈을 멈춰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꿈꾸며 성장하는 삐삐처럼, 영화 속 아스트리드처럼. 나 자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으로 커가는 것이 아닐까. 아스트리드의 성장담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그것이 가져올 따스함을 보여주었다. 현실의 우리가 꿈을 좇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 아주 조금은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 개봉 전 시사회를 통해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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