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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06. 2021

아프도록 최선이었던 우리의 삶에게, <최선의 삶>

이제는 목놓아 울어도 괜찮아

하염없이 달리기도 했었고, 털썩 주저앉아 버리기도 했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무엇이 최선인지는 알았기에.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최선의 선택만을 고르지는 않아왔기에. 때로는 감정에 따라서, 때로는 흐름에 맞춰서, 또 때로는 그저 최악을 피하고만 싶어서. 최선의 삶을 살라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과거에는 언제나 후회를 남겨왔다.


좋은 것, 올바른 것.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라고 했던 것, 왜 그렇게 하지 않냐며 내게 물어왔던 것. 틀림없이 그것들은 나를 최선의 삶으로 인도해줬을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해 주었을 테다. 착한 아이가 되지 못했던 그때의 나에게 누군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평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부정할 수는 없다. 나 역시도 후회를 안은 채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래야만 했다고. 최선이 아님을 알면서도 선택해야만 했다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눈덩이 앞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저 달릴 수밖에 없었다.



강이(방민아)를 둘러싼 세상에서 우리의 기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 좋은 학군을 좇아 위장 전입까지 마다하지 않던 부모님과 주위의 시선 속에서 친구라는 버팀목에 더욱더 매달렸던 강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가득했던 교실과 그 폭력에 무관심한 선생님들. 그 시절을 겪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매 장면 가득 묻어있는 부끄러운 동질감에 그때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화나고, 후회되고, 그리고 안쓰러웠다. 강이도, 아람이(심달기)도, 소영이(한성민)조차도 분명 아픔에 벅찼을 텐데. 그 아픔에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악착같이 최선이고자 했다.


강이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다. 혼자만의 힘으로 버티기엔, 학교란 너무나 치열하고 잔혹한 공간이었으니까. 연구단지가 즐비한 전민동의 학교에서 달동네 읍내동 아이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원어민 같은 버터발음이 놀림거리가 아니라 당연지사가 되었고, 읍내동에선 잘 나갔던 언덕 위 빌라도 초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앞에서는 그저 가난의 상징이 될 뿐이었다. 위장 전입의 진실을 누군가가 알든 알지 못하든, 강이 스스로는 매일매일 남들과의 차이를 감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준 친구들이 바로 아람과 소영이었고, 때문에 강이는 언제나 강아지처럼 그 둘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절친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었다. 소영의 최선에는 더 이상 강이가 필요치 않게 된 것이었을까. 강이는 놀림받고 무시당하며 몇 번이고 배신을 겪었다. 매체에서 종종 인생은 끝나지 않는 레이스라고들 한다. 쉼 없이 달려야 하며, 뒤돌아보면 금세 뒤쳐지고 마는 치열한 레이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누군가의 꿈을 짓밟아야 했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해야 했다. 소영이가 그랬고,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최선을 골랐을 뿐이었다.


아픔이 닥칠 때마다 강이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여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든, 도움을 구하든, 그곳에서 빠져나오든. 본인의 감정과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민동 학교를 다니는 게 어머니가 바라는 최선이었고, 조용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학교가 원하는 최선이었으니까. 강이를 둘러싼 온갖 바람들은 그가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역시 아픔에 익숙해질 정도로 그저 최선이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떤 선택을 했었나. 태어나 처음 마주한 거대한 폭력 앞에서, 나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그 모든 아이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되풀이하며, 눈으로는 시곗바늘만을 쫓아다녔다. 작품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나는 최악의 병신이었다. 찌를 걸, 던질 걸. 설령 최악이 된다 하더라도 그때 일어나 움직일 걸 그랬다. 그날 이후로 후회를 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강이는 달랐다. 최후의 순간에 그는 움직였다. 품에 넣고 다니던 식칼을 꺼내 소영에게 달려 나갔다. 내가 하지 못했던, 대부분의 우리가 하지 않았던 선택을 강이는 기어이 하고야 말았다. 찌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던 나였기에, 그 순간에 안타까움과 함께 자그마한 희열과 만족감을 느꼈다. 분명 강이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 한 편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량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는 가벼운 발걸음 대신 도망치듯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고, 작중 처음으로 목청껏 울음을 터트렸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은 어딘가 나와 같아 보였다.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이란 없는 법이다. 곧이어 찾아온 경찰들의 소리에 강이의 마음에는 불안과 후회가 가득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후회하는 끝을 맞게 되다니. 결국 최선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영화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폭력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생략하거나 암시하거나 혹은 다른 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하거나. 그런데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이 영화가 그 모든 폭력의 절정이 되는 마지막 신(scene)만큼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는 아니겠는가. 어쩌면 영화는 우리가 고르지 않았던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전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때의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코 최선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자. 최악을 두려워하지 말자. 최선을 고집하지 말자. 우리 모두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왔으니까.


이제는 목놓아 울어도 괜찮아. 조금은 쉬어가면서 나 자신과 마주해도 괜찮아.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뎌보자. 비록 최선의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곧 최고의 삶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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