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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Nov 01. 2021

심연에 발을 담근 채, <아네트>

떨어지는 우리에게 전하는 선행자의 회고록

심연이란 곧 충동이다. 지독하고 끈적한 우리의 갈망이다. 다른 이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감추고 무시하고 빠져나와야만 하는 새까만 암부다. 그 속에 살고 있는 비뚤어진 악마(The Imp of the Perverse)는 나와 당신 모두를 상처 입힐 뿐이니까.




영화 <아네트>의 주인공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이다. 경박하고 냉소적이지만 관객들은 그를 사랑했고, 당대 최고의 오페라 스타와 결혼까지 성공하며 그는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빛으로 가득했다. 기자들이 터트리는 카메라의 불빛과 오직 그만을 위해 빛나는 무대 위의 조명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곁에서 노래하는 아내 안(마리옹 꼬띠아르)이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헨리는 자신이 심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말했지만, 그는 이미 그 연못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글쎄. 내 경험에 미루어보자면,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어느샌가 우리는 빛이 아니라 저 시꺼먼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더라. 이제 그에게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니다. 밝게 빛나는 것들은 자신의 빛을 빼앗아간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서서히 비뚤어진 악마가 되어간다.



착잡했다. 이토록 비참할 수가. 기꺼이 심연으로 떨어져 버린 그는 끝없이 갈망했고 끝없이 분노했으며 끝없이 불안에 떨었다. 아내를 죽이고, 동료를 죽이고, 아이를 이용하고. 모든 것은 잃어버렸다 생각한 빛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결국 헨리는 빛을 잡을 수 있었을까? 설마 그럴 리가. 애초에 잃어버린 적도 없었는 걸. 아내가, 동료가, 아이가. 그가 스스로의 손으로 하나씩 꺼트려온 빛들이 아니었는가. 그는 그저 더욱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이성의 심판을 받고 수감된 그의 앞에 자신을 벗어난 딸 아네트(데빈 맥도웰)가 찾아왔다. 더 깊숙이 도망치며 그 많던 빛들을 다 놓쳐버린 헨리는,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던 걸까. 그는 살포시 딸의 손을 붙잡고는 용서를 구하며 이렇게 물었다.

너를 사랑하면 안 되겠니?


후회되겠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는 영원토록 자책하겠지. 그러나 흘러가버린 시간은 절대로 되감기지 않고, 회개와 반성만으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심연에 떨어진 그에게는 이제 빛을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리라.



슬프지만 안 돼요.
이제 아빠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어요.


그것은 심연에 몸을 담근 자에게 내려진 벌이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상처 입힐 수도, 자신을 상처 입힐 수도 없는 그곳에 갇혀 외로이 눈을 감는 것. 그 속에서 영원토록 지난날을 후회하는 것. 그것이 그가 택한 길의 마지막이다.


때때로 우리의 눈과 고개도 마음속 심연을 향해 기울고는 한다. 화가 나고 답답할 때. 우울감과 불안에 빠질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샌가 나도 몰래 빠져버리고 만다. 황홀하고 안락하기에 그 속에 이끌리고, 불안하고 두렵기에 더욱더 중독된다.


그런 우리에게 영화는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다시 돌려 주위의 빛을 안아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는 사랑할 수 없는 딸에게, 언젠가 그와 같아질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헨리가 남긴 마지막 말은 '심연을 바라보지 마라' 였으니까.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분명 그에게 남은 마지막 양심이었으리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을까. 심연에 발을 담근 채 살아가는 내가 손을 뻗어 빛을 잡을 수 있을까. 달빛도 별빛도 내 곁에 줄지어 있는데, 왜 나는 그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걸까. 비뚤어진 악마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밖에 없을 텐데.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며 오늘도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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