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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02. 2021

악몽에도 혼자가 아니라면, <라스트 나잇 인 소호>

과거를 놓아주며 완성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

You have to let go! (이제 그만 놔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순식간에 머릿속이 온갖 감정으로 가득 차 버리곤 한다. 후회되는 일들, 화가 났던 일들, 그리고 이따금 행복했던 순간들. 흘려보내기 힘든, 차마 지울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지금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고인 채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질수록. 과거의 감정들에 점점 더 빠져갈수록. 지금의 나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 어느샌가 새로운 후회를 쌓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이제 그만 놔줘야 한다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야만 한다고. 물론 한마디 말에 사라질 정도로 가벼운 기억들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걸 테니까. 몇 번이나 잊으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토록 힘든 싸움을 해온 우리이기에 어쩌면 조금은 허무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잊으려고만 했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건 잊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거였다니. 기억은 간직한 채, 감정은 남겨둔 채, 새로운 오늘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과거를 과거로서 놓아주는 것이었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엘리(토마신 맥켄지)에게는 요즘 아이 같지 않은 특별함이 있었다. 신문지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채, 스마트폰 대신 턴테이블 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방 안에는 60년대 영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최첨단을 나아가는 주변 아이들과 달리, 그의 우주는 여전히 6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짜 취급을 받은 엘리였지만, 무엇보다 그를 특별하게 했던 건 바로 환상을 보는 그의 능력이었다.


엘리는 꿈과 거울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고 또 체험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영과 함께해 왔으며, 런던의 하숙집에서는 과거 그곳에 살았던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의 삶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이 꿈꾸고 선망했던 60년대 런던의 삶. 황금빛의 거리와 붉게 빛나는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입이 턱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신비함과 우아함에 매혹된 채 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런던의 스테이지는 겉껍질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끈적하게 먹잇감을 기다리는 마수들의 그림자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예술계에서는 특히 더. 성상납, 스폰서의 존재는 일종의 불문율과 같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타파하지 않았고, 알게 되었음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작중 샌디의 매니저이자 포주로 등장하는 잭(맷 스미스)의 말처럼, 그 바닥에서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게 마수들의 거대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는 샌디의 저항조차 그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유희가 될 뿐이었고, 결국 다른 수많은 여인들과 같이 그의 젊음 또한 그곳에서 져버리고 말았다.


환상 속에서 샌디의 최후를 목격한 엘리 곁으로 시꺼먼 망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샌디를 집어삼킨 더러운 손들이 이제는 엘리까지 잡으려 했던 걸까.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끝은 없었고, 어디를 가도 괴물들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어느샌가 그 역시 과거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꿈속이 아님에도 현실과 과거가 겹쳐졌고, 원하지 않는데도 악몽 속으로 끌려갔다. 그 끔찍한 반복 속에서 현재의 엘리마저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영화의 후반부, 밝혀지는 진실 앞에서 엘리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잭에 의해 살해당한 줄만 알았던 샌디는 모두에게 복수한 채 멀쩡히 살아있었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망령들이야말로 샌디의 손에 죽은 '실종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샌디의 칼끝은 이제 자신을 향했고, 망령들은 입을 모아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이제껏 믿어왔던 과거의 결말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쳐버릴 정도로 과거에 사로잡혔던 엘리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을까? 꿈을 꾸던 젊은 날의 샌디는 이제 정말 사라져 버린 거였을까?



I've been in a prison all my life.
(내 평생이 감옥 같았어.)


샌디와 엘리,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계기가 되어주었다. 과거를 놓아주고 지금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 멈춰있던 발을 움직여 성장할 수 있는 계기. 샌디는 본래 자신이 살아온 집을 팔거나 떠날 생각은커녕,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그때에 머물러 있었고, 또 그대로 묻어두려고만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망령들의 얼굴에는 가죽을 덮어 씌운 채, 과거의 감옥 속에 스스로를 계속해서 가두어만 왔다.


하지만 엘리를 쫓아 올라가 망령들과 마주하게 된 순간, 그는 덮어두기만 했던 자신의 악몽을 드디어 직시하게 됐다. 그때의 공포가 또다시 올라왔겠지. 참을 수 없었던 분노에 마음이 흔들렸겠지. 겹쳐지듯 지나가는 과거의 장면들은 샌디의 불안을 나타내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겪어온 고통과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두 다 알고도 힘이 돼주고자 했던 엘리가 곁에 있었다.


그랬기에 샌디는 마지막 순간, 칼날의 끝을 엘리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었으리라. 과거의 분노로부터 한 발자국 나아간 이제야 비로소 스스로의 죗값마저도 치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샌디에게 엘리는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어준 은인과 같다. 구할 수 없다고 외쳤음에도, 샌디는 이미 엘리에게 구원받았던 것이다. 단지 손에 피를 묻혀온 그에게 허락되는 구원이 거기까지였고, 그 또한 그것을 깨달았기에 엘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You cannot save me. Save yourself.
(넌 나를 구할 수 없어. 너 자신을 구해.)


샌디는 엘리에게 이제 그만 놔주라며, 스스로를 구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대체 무엇을 놔주라고 했던 걸까. 자기 자신이었을까? 나는 그 대상을 엘리가 붙잡고 있던 수많은 과거의 조각들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었고, 런던으로 와서는 샌디가 겪은 고통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현실마저 망가져버릴 때까지. 어쩌면 샌디는 엘리에게 이제 조금은 그 조각들을 놓아주라고, 지금의 너 자신을 구하라고 외쳤던 게 아니었을까.


사건이 마무리된 뒤, 엘리는 목표로 하던 패션쇼에 나가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과거 샌디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던 의상이 아닌, 그 기억을 지니면서도 독창성을 더한 새로운 디자인으로. 샌디를 따라 하던 금발 머리가 아닌, 자기 자신의 갈색 머리로. 과거를 놓아주고 악몽에서 벗어나 엘리 또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제는 거울 속에 나타난 어머니와 샌디의 환영에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던 거겠지.



샌디와 엘리, 두 사람은 모두 악몽 속에 묻혀 왔다. 한 사람은 악몽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다른 한 사람은 현실이 되어가는 악몽 속에서. 하지만 아픔을 공유한 서로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일어날 수 있었고 오늘이 들어올 여유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팬데믹으로 미뤄진 끝에 4년 만에 돌아온, 스타 감독 에드가 라이트의 신작이다. 영화를 보며 감독의 특기인 박자감을 즐기고 치밀한 복선들을 찾아보았다면, 영화가 끝난 뒤엔 마지막 결말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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