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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Nov 11. 2021

파스토스는 지금 후회하고 있을까

<이터널스>의 뜨거운 감자, 히로시마 장면에 대하여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다음 영화 <이터널스> 네티즌 평점

영화 <이터널스>가 뜨거운 논의를 몰고 올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블과 디즈니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다양성이 두드러진 작품이었기에. 정치적 올바름(PC)에 관한 논의가 고스란히 적용될 게 불 보듯이 뻔했다. 아이와 어른부터 여성과 남성, 농인과 청인, 이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다양한 인종까지.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이 파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문제 삼겠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이슈들로 영화는 가득했다.


그런데 웬걸, 그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며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인터넷 기사와 한줄평들 사이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들이 열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역사 왜곡일본 미화.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장면이 대중의 도마 위에 올랐더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워딩에 하루빨리 극장으로 달려갔고, 그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원폭이 언제 어떻게 다뤄질지만으로 가득했다. 좋아하는 감독과 좋아하는 프랜차이즈가 만난 이 작품에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에, 논란의 진실을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만 싶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인터넷 공간을 채운 그들의 불꽃이 내게도 옮겨 붙더라. 조금이지만 나도 화가 났다. 왜곡이라니. 미화라니.

이토록 편협하게 영화를 봤을 줄이야.

그토록 치우치게 세상을 봤을 줄이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인류 역사에 있어 그저 수많은 전쟁 사건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빛 뒤편에서 짙어져 가던 인류 문명의 그림자가 낙진을 타고 기어이 온 세상을 차갑게 덮어버린 순간이었다. 기술의 발전은 정말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가. 문명의 가치를 내세워 자연을 정복하고 야만을 탄압해온 끝은 결국 폭력의 반복일 뿐인가. 영화 <이터널스> 속 드루이그와 파스토스의 고뇌처럼, 우리의 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가 화두에 오르게 된 순간이었다.


연합국의 옳고 그름도, 추축국의 옳고 그름도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누가 끝내지 않아 전쟁이 계속되었는지 또한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 입었다. 중요한 건 그 사실뿐이다. 전쟁 속에서 사라진 약 7,000만의 사람들과 슬픔을 안고 남겨진 무수한 사람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걸까. 그 비극을 직시하는 용기에 어째서 왜곡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걸까.



나는 모든 의견이 존중받아 마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숙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포함해 세상에는 너무나 좁디좁은 시야로 생각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이해를 나누어 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헐뜯고 무시하기 위해 내뱉어진 의견이라면, 그 말에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야가 너무 좁아서. 생각이 너무 작아서. 우물 밖으로는 나가지를 못해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시선이야말로 왜곡되어있음을 모른 채, 그저 타인을 향해서만 화살을 쏘아댈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말을 자주 쓰곤 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전적 뉘앙스와는 조금 다르게, 마음의 유무가 아니라 능력의 유무로 의미를 지었지만 말이다. 내게는 팔이 있고 발이 있으며 누군가에게 사주를 할 목소리도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를 잠재적 범죄자라 불렀고 내가 보는 세상은 언제 어디서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극도의 위험지대였다.


그러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을까. 사건으로든 사고로든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도저히 내 마음까지는 와닿지가 않았다. "분명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잠재적 범죄자였을 테니까.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이 하나 줄게 되었으니,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진 게 아닐까. 대승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당시의 내 시야는 심각하게 비뚤어져있었다.



만일 내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직 우물 밖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다고 답할 것이다. 매 시간 매 분 매 초를 죽음과 함께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여전히 자신을 잠재적 범죄자라 여기고 있다. 스스로의 죽음에는 지나치게 관대해졌으며, 그렇다고 그 끝에서 오는 불안이 사그라들지조차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우물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다. 우물 속에 남겨지는 건 나 혼자만이어야 했다. 더 이상 다른 누군가에게 멋대로 꼬리표를 붙이지는 않는다. 모두의 속내를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정작 그 자만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범죄자로 가득 차있는 줄 알았는데. 되돌아보니 비로소 알겠더라. 적어도 내가 이제껏 만나온 사람들 중에는 결코 죽어 마땅한 사람도, 죽어도 괜찮은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과거의 나는 그저 내 죽음에 남들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겁쟁이일 뿐이었다.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면,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은 국가를 유지한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기에, 어느 한쪽의 횡포로 다른 한쪽이 매몰되는 것을 막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도 단지 '국민'이라는 익명의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었고, 개인으로서의 생활 역시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순간 우리의 균형은 무너지고 만다. 실제로 전장을 가로지르는 건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이지만, 그 전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국가이기에. 국민이 아닌 국가의 생존이 전쟁의 우선 목표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우리는 커다란 기계에 매달린 톱니바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여겨진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실종된 채, 싸우고 도망치다 망가지면 떨어지는 그저 그런 부품이 되고 만다.


설령 사람이 한낱 기계부품과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무차별적인 대규모 공격에는 어떠한 참작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고장의 원흉을 찾지는 못할 망정, 고장 났으니 부수겠다는 식의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래, 어쩌면 부숴버린 그 잔해 속에 악독한 원흉이 숨어있었을지도 모르지. 예전에 내가 단정했던 것처럼 그들 모두가 잠재적인 가해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린다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우물에만 틀어박혀있던 전쟁의 주체들이 지난날의 내 모습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영화 <이터널스>의 히로시마 장면은 파스토스의 심리적 배경을 설명하며 등장했다. 왜 그가 이터널스의 해산 이후 능력을 숨긴 채 은거하고 있었는지, 함께 싸우자는 동료들의 말에 어째서 선뜻 Yes라고 답하지 못했는지. 영화는 현실의 입장을 배제하고 오직 그 의문들에만 답하고자 했다. 만일 진심으로 일제를 미화하고 역사를 뒤틀고자 했더라면, 이터널들의 모습이 아니라 황폐해진 주변을 비추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배경을 담는 데에 있어 일가견을 인정받은 감독인데, 과연 그것조차 몰랐던 걸까.


카메라는 대신 파스토스의 감정에 집중했다.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그가 느꼈을 슬픔과 실망, 후회와 자책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문명의 진보를 위해 기술의 씨앗을 심어온 그였기에, 결코 의도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곳에서 자라난 문명의 비극까지도 그에게는 자신의 책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즈텍 원주민들을 덮친 철과 화약의 군대와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떨어진 리틀보이. 이 장면들에서 중요했던 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던 이터널들의 자기혐오였다.



일본 제국은 절대로 피해자가 아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으며, 그들이 자초한 비극이었다. 일제는 결코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 히로시마에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모두 피해자가 되어선 안 되는 걸까. 누구도 그들을 위해 눈물 흘려서는 안 되는 걸까. 그들은 정말 죽어 마땅한 악마들이었던 걸까.


파스토스는 일제를 위해 무릎 꿇지 않았다. 그는 폭력 속에서 사라져 간 이름 모를 개인들을 위해 슬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눈물이 역사에 대한 왜곡이 된다면, 그 장면을 보고 정말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내가 외쳤듯, 우리는 결국 죽어 마땅한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범죄와 다를 것이 없을 테니까.




만일 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면.

파스토스는 지금 또다시 후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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