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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17. 2021

영웅에게 배우는 진실의 무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결말과 그 선택의 의미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정보의 홍수라는 경고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했다. 인터넷 속 범람하는 정보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주도권을 빼앗겨선 안 된다. 정보들을 맹신하지 말고 유용하게 골라내야만 한다. 아직 어렸던 당시의 내게, 이러한 말들은 그저 걱정 많은 누군가의 호들갑으로만 들려왔다. 그야 걱정하고 경계하기엔 인터넷의 은총은 너무나도 달콤했으며, 설마 내가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나 우려는 어김없이 현실이 되었고, 2010년대 후반 전 세계에 가짜 뉴스라는 모습으로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지금 내 눈앞의 뉴스가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럼에도 믿고 싶은 것을 찾아 그것이 진실이라 믿기를 계속했다. 진짜 진실을 찾고 싶다 말하면서도, 그저 진짜 뉴스를 가짜 뉴스라고, 가짜 뉴스를 진짜 뉴스라고 되뇔 뿐이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 가만히 눈을 감아 버리고만 말았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자극적인 감정들만 키워나갔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편해지려고만 했다. 나와 다른 생각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내 생각이 정말 맞는지에 대해 고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모든 스트레스를 그저 다 내려놓고만 싶었다. 내 생각이 다 옳다고, 내가 믿는 것이 다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해질 테니까. 진실의 무게를 짊어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을 가벼이 여기며 내 입맛대로 내 감정대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알면서도 자신을 바로잡지 않던 내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계기가 찾아왔다.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스타크 사의 지원. 진실을 뒤흔드는 빌런 미스테리오와 진실에 대해 책임감을 일궈낸 영웅 스파이더맨. <홈커밍>으로 시작하여 <파 프롬 홈>에서 터져 나와 <노 웨이 홈>으로 마무리되는 MCU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내게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진실에 관한 영화다. 우리가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진실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영웅의 이야기를 빌려 현실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그럼 지금부터 피터의 선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그 선택이 내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조심스레 그 진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을 게 필요해.
그리고 지금은... 뭐든 믿을 거야.


영화는 <파 프롬 홈>의 마지막 장면에서 곧바로 이어졌다. 데일리 뷰글을 비롯한 온갖 언론들은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의 마지막 영상을 실어 날랐고, 그가 남긴 말 그대로 사람들은 거짓마저 진실이라 믿기 시작했다. CG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짜 영웅은 진짜 우상이 되었고, 그와 싸워 도시를 지켜낸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살인 누명을 쓴 채 비난 속에서 도망 다녀야만 했다.


그들은 영웅의 실패, 추락, 죽음에 더 열광하지.


2002년에 개봉했던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에서 그린 고블린(윌렘 포)은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을 회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디어에 휩쓸리는 대중이란 그런 존재라고. 지금은 영웅의 반짝거림에 열광할지언정, 언제든 더 큰 재미와 자극을 좇아 돌아설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러니 자신과 함께 분노하여 세상에게 복수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당시의 시민들은 누구 하나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피터 혼자서 감당했던 진실의 무게를 모두가 나누어 받쳐주고자 했다. <스파이더맨 2>(2004)의 지하철 전투에서 마스크가 벗겨진 스파이더맨을 감싸던 사람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며 그의 진실을 함께 짊어져 준 사람들. 그들은 황색언론에 사로잡히지 않고, 피터 파커라는 한 사람의 진실된 마음을 들어주었다. 슈퍼파워 없이도 정의로운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가 영웅이고 다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시리즈의 주제가 그곳에서 피어났다.



그런데 <노 웨이 홈>의 사람들은 어땠는가. 미디어에 선동되어 피터를 체포하던 공권력과 그에게 돌을 던진 미스테리오의 추종자들. 혹은 그저 영웅 스파이더맨을 맹신하며 추앙하던 그의 지지자들. 그들 모두가 피터에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그들이 보고 싶은 진실을 확인하기에 급급했다. 오직 자기 손 안의 화면을 통해서만 그를 바라볼 뿐, 눈앞에 선 그의 진심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옹호와 비난이라는 자신들의 입장만을 우선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드높여갈 뿐이었다. 마치 어린 내가 그랬듯이, 그들 또한 진실의 무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데일리 뷰글의 J. 조나 제임슨(J. K. 시몬스)도, 양극으로 나뉘어 피터를 둘러싸던 사람들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 거짓은 없었으리라. 영화 밖에서 사건을 지켜본 우리는 진짜 진실을 알고 있지만, 영화 속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라고는 미스테리오가 만들어낸 거짓 영상이 전부였으니까.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진실을 밝혀낼 힘 따위는 없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정보는 모두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니까. 누군가의 입을 거쳐야만 우리의 눈과 귀로 들어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전에 <조커>(2019)에서 느꼈던 불안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이제껏 품어온 분노와 혐오는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순간의 감정에 매몰되어,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에 홀려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내 귀에 들리는 그것이 내 목소리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저 방송에서, 뉴스에서, 유튜브에서 누군가가 정리해준 사실만을 보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쉬이 치부해버렸던 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과 마주할 때, 감정에 압도되어서는 안 다. 감정은 너무나도 쉽게 전도되고 불어나기에. 어느샌가 너무 커져 진짜 진실을 가려버릴지도 모르니까.



영화의 마지막, 또 한 번 세상을 구하기 위해 피터는 마법으로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둘도 없는 친구에게, 너희가 기억을 잃더라도 반드시 찾아가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사건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흐른 뒤 연인 MJ(젠데이아)를 찾아간 피터는, 그에게 결국 진실을 전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할지 종이에 적어가며 연습까지 했으면서 정작 그의 앞에서는 진실을 주머니 속에 아껴놓기를 택했다.


어째서 그는 진실을 전하지 않았을까. MJ의 이마에 남은 상처를 봐서?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또 망치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피터는 진실의 무게를 떠올린 게 아니었을까. 만일 그가 그 자리에서 사실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며 우리가 원래 연인 사이였다고 이야기하더라도, 기억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은 처음 보는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이자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으리라.


반가움에, 또 그리움에. 당장이라도 진실을 전하고 싶었겠지. 셋이서 함께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지.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순간의 감정을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그 감정에 몸을 내던지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마음속에 담아놓은 채, 성급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진실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스스로의 목소리로 진실을 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으로 진실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그것이 진짜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배웠으니까.



영화 내내 피터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든 옳지 않은 일이었든, 당장의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MCU에서 가장 이성적이라 할 수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빌런들을 치료하려 했고, 큰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그린 고블린에게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살의를 안은 채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는가. 도와주고자 시작했던 치료 프로젝트는 더 큰 비극을 몰고 왔고, 최후의 순간에는 분노에 눈이 멀어 그 스스로가 빌런이 될 뻔했다. 만류하는 목소리가 귀에 닿지 못할 정도로 그의 감정은 극단으로 내몰려 있었다.


그랬던 그를 다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나 자신들, 다른 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이었다.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분노를 삼켜온 그들이었기에. 어른이 된 내가 어린 날의 자신을 타이르듯, 감정이 생각을 앞지르지 않도록 이끌어줄 수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가 만일 아이였던 그대로, 또 다른 피터들과 만나기 전 감정에 휘둘리던 그대로였다면, 그는 MJ에게 곧장 달려가 진실을 말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울 테니까. 말해버리면 후련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는 감정에 묻혀 사라져 버린 진실을 경험했기에. 진실이란 누군가의 말 한마디, 글 한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는 고백 대신 또 보자는 말을 건네었던 게 아니었을까.



영화는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를 그때 그 시절의 모습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빌런들은 안티에이징 기술까지 사용하며 해당 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 데려왔으면서, 스파이더맨들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차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이 작품이 그저 과거를 추억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어른 피터가 아이 피터에게, 그리고 그 아이 피터가 어른이 되어, 성장을 지켜본 우리에게 전하는 일련의 메시지다. 과거를 지나온 우리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와 진실과 마주할 수 있도록. 그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말고 진실의 무게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다정한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영웅의 가르침에 다시 한번 그들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새로이 시작될 다정한 이웃의 이야기는 조금 더 성장한 내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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